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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삶의 행복/🍒자유게시판

죽음은 환상이 끝나는 것

by 이初心 2023. 3. 18.

    죽음은 환상이 끝나는 것

    공간과 시간의 진정한 본질

    다음과 같이 숙고해 봅시다.
    침묵만 있고 아무것도 없다면, 침묵은 당신에게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침묵이 무엇인지도 모를 것입니다.
    소리가 있어야 침묵 또한 존재합니다.

    마찬가지로 공간 속에 아무런 물체도 없다면, 공간은 당신에게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 자신을 별도 은하도 없는 텅 비어 있는 광활한 공간을 떠다니는 한 점의 의식이라고 상상해 보십시오. 갑자기 공간은 더 이상 광활하지 않을 것이며, 아예 거기 존재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여기서 저기까지의 움직임도 없을 것이고 속도도 없을 것입니다.

    거리와 공간이 존재하려면 적어도 두 개의 점이 필요합니다.
    공간은 하나가 둘이 되는 순간 존재하게 됩니다.
    두 개의 극이 수만 개가 되면서 공간은 점점 더 광활해집니다.
    이렇듯 세상과 공간은 동시에 생겨납니다.

    공간이 없이는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지만 공간 자체는 무입니다.
    우주가 존재하기 이전에 빅뱅이 있기 이전에 광활한 빈 공간이 채워지기를 기다리면서 ‘있었던’것이 아닙니다. 어떠한 공간도 없었습니다.

    단지 ‘현시되지 않은 세계’하나가 있었을 뿐입니다.

    그 하나가 수만 개가 되면서 갑자기 공간이 거기 있는 듯이 보였고, 많은 것들이 존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공간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신이 우주를 수용하기 위해 만들었을까요? 물론 아닙니다. 공간은 사물이 아니며, 따라서 창조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맑게 개인 밤에 밖에 나가 하늘을 쳐다보십시오.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수많은 별들은 실제로 거기에 있는 별들의 지극히 적은 일부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이미 초강력 망원경을 통해 십억 개의 은하를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각각의 은하는 다시 수많은 별들을 갖고 있는 ‘우주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욱더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우주 자체의 무한함과 이를 데 없이 장엄한 그 깊이와 고요함입니다. 우주의 무한한 광활함과 고요함보다 경이롭고 장엄한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비어 있음’입니다. 광활한 ‘비어 있음’입니다.

    우리가 마음과 감각을 통해 우주 속 공간으로 보고 있는 것은 현시되지 않은 세계가 외부로 나타난 모습입니다. 그것은 신의 몸입니다. 그리고 가장 위대한 기적은 우주를 존재하게 하는 그 고요함과 광활함이 공간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 안에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완전하고 철저하게 현존할 수 있다면 당신은 무심의 고요한 내적 공간으로서 그것을 만날 수 있습니다. 당신 안에서 그 공간은 깊고 광대합니다. 확장의 측면에서 광대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거기서 특별히 확장된 기분을 느끼는 것은 초월의 한 속성인 무한한 깊이를 잘못 인식한 것뿐입니다.

    아인슈타인은 공간과 시간은 분리되어 있지 않다고 했습니다.
    잘은 모르지만 그 말은 시간이 공간의 네 번째 차원이라는 의미 같습니다.
    그는 그것을 ‘시공 연속체’라고 불렀더군요.

    그렇습니다.
    당신이 외적으로 공간과 시간을 인식하는 것은 어차피 환상이지만, 거기에는 핵심적인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공간과 시간은 신의 두 가지 본질적 속성인 무한함과 영원함이며, 당신은 마치 그것들이 당신 바깥에 있는 것처럼 인식합니다.

    당신은 당신의 내면에 시간과 공간의 진정한 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공간은 무심의 평온하고 끝없이 깊은 영역이며, 시간은 현존, 즉 영원한 ‘지금’에 대한 인식입니다. 그 둘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공간과 시간이 내면에서 무심과 현존이라는 현시되지 않은 세계로 인식될 때, 외부적인 공간과 시간은 여전히 당신에게 존재하긴 하지만, 훨씬 덜 중요해집니다. 세상은 계속해서 존재하지만, 당신을 더 이상 속박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궁극적인 목적은 세상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초월하는 데 있습니다. 공간 속에 물체가 없으면 공간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나타나지 않은 세계를 깨닫기 위해서는 나타난 세상이 필요합니다.

    붓다는 “환상이 없다면 깨달음도 없다.”고 했습니다.
    나타나지 않은 세계는 이 세상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당신을 통해 그 자신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우주가 그 신성한 목적을 펼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깨어 있는 죽음

    이미 말했던 꿈 없는 잠 외에도 저절로 열리는 또 하나의 문이 있습니다.
    그 문은 육체가 죽는 순간에 잠깐 열립니다.
    당신이 평생 동안 영적인 깨달음을 위한 모든 기회를 놓친다고 해도 육체가 죽는 순간 마지막 하나 남은 문이 열릴 것입니다.

    죽음 직전에 다시 살아났다고 하는 많은 사람들은, 대개 그 문을 찬란한 빛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들 중 상당수가 더없는 축복과 깊은 평화를 느꼈다고 말했습니다.

    《티베트 사자의 서》에서는 ‘찬란하게 빛나는 무색의 공간’으로 묘사하면서 그것이 곧 ‘당신의 진정한 자아’라고 말합니다. 이 문은 아주 잠깐만 열릴 뿐이며, 당신이 살아 있는 동안 현시되지 않는 세계의 차원을 경험해 보지 못했다면 놓치기 쉽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나친 저항과 두려움을 갖고 있고 감각 경험에 지나치게 연연하며, 현시된 세상에 너무 깊이 동화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문을 보고도 두려움이 앞선 나머지 돌아서게 되고 의식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 이후에는 대부분 무의식적이고 자동적으로 반응하게 됩니다.
    결국엔 탄생과 죽음의 윤회를 되풀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의 현존이 의식적인 불멸을 이루기에 충분히 강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 문을 통과한다는 것은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까?

    다른 모든 문을 통과할 때와 마찬가지로 당신의 빛나는 본성은 남아 있습니다.
    개성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떠한 경우이든 개성 안에서 진정한 가치가 있는 참된 것은 빛을 발하는 진정한 본성입니다. 그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가치 있고 참된 것이라면 그 어떤 것도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죽음이 가까워진 상황이나 육체적인 형상이 분해되는 죽음 자체는 항상 영적인 깨달음을 위한 크나큰 기회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부분은 그 기회를 놓쳐버립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문화라는 테두리 안에서는 진정으로 중요한 것에 대해 거의 전적으로 그러하듯, 죽음에 대해서도 거의 완전한 무지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문은 죽음의 문입니다.
    거짓 자아가 죽는 문입니다.
    그 문을 통과할 때, 심리적인 마음이 만들어낸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서의 당신 자신은 막을 내립니다.

    그때 당신은 눈에 보이는 모습과의 동일시가 환상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죽음 또한 환상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죽음은 환상이 끝나는 것일 뿐입니다.
    환상에 매달리고 집착하기 때문에 죽음이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 중에서-

    출처: 사이버에서

죽음은 환상이 끝나는 것.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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