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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과 동행을/💕법문의도량

현생에 주인공으로 살아라.

by 이初心 2023. 8. 20.

    현생에 주인공으로 살아라.

    불교는 오늘의 종교이다.
    어제도 내일도 아닌 오늘의 주인공으로 오늘 지금을 누리는 것이다.
    부처님은 전생을 묻거나 내생을 알고자 하면, 침묵으로 답변하신 큰 스승이다. 불교는 부처님을 믿는 종교가 아니라 그 가르침으로 깨달음을 얻는 종교이다. 부처님은 무아, 무상, 연기법과 중도 사상으로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열어 보여주시고 있다.

    육바라밀(六波羅密)과 팔정도(八正道)는 수행자가 가출 덕목으로 실천하면 누구나 마음의 평화, 행복, 자유를 누리게 된다. 또한 불교의 대표적인 가르침은 무아(無我)사상이다. 무아사상과 연기법은 하나이다. 연기란 모든 것은 원인과 조건이 있어서 생겨나고 원인과 조건이 없어지면 소멸한다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이를 아래의 시로 간명히 표현하신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차유고피유(此有故彼有)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긴다./ 차생고피생(此生故彼生)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고/ 차무고피무(此無故彼無)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 차멸고피멸(此滅故彼滅)
    ​『잡아함경』 제30권 335경

    불교의 핵심 사상은 연기법칙(緣起法則)과 중도사상(中道思想)이다. 연기법칙과 무아사상(無我思想)은 결코 둘이 될 수 없는 하나이다. 불교는 오늘의 종교이며 당생윤회(當生輪廻)에 방점을 찍어 살피고 또 살필 일이다. 중도 사상을 한마디로 표현한 선지식이 임제 선사의 수처작주(隨處作主)이다.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가운데(中)가 아니라 누리는 중(中)이기 때문이다. 중(中)에는 변두리와 모서리가 없는 것이다. 발길 닿는 곳이 정토(淨土)요 서 있는 곳이 세상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교의 중도(中道)는 양변불락(兩邊不落)이 아니라 양변무애(兩邊無碍)이며 무변중심(無邊中心)인 것이다.

    중(中)은 정(正)이다. 대(對)와 변(邊)에 걸림 없이 자유로운 것이 중(中)이요, 사(邪)와 미(迷)에 치우침 없는 머묾 없는 머묾이 정(正)인 것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변한다. 인도 고대사상으로 만물의 창조주 브라흐만(brahman)도 인정할 수 없지만, 내 몸 안에 주재자 아트만(atman)도 인정할 수 없다. 열반의 사덕인 상락아정(常樂我淨)도 부정의 의미가 아닌 현실 세계에서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긍정의 의미임을 알아야 한다. 영원불변하는 그 무엇도 인정할 수 없는데 그 무엇이 주체가 되어 육도를 윤회할 수 있는가?

    사람은 살아서 윤회하는 존재이다, 당생윤회(當生輪回)이다. 살아서 극락정토를 누릴 주체라는 걸 절대 잊지 말 일이다. 부처님이 이 세상에서 마지막 남기신 말씀은 ‘게으름 없이 정진하라’ 이다. 게으름은 병이자 어둠이다. 정진(精進)은 깨달음에 이르는 바른길이자 빛인 것이다.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가며 몸과 마음을 송두리째 던지는 간절함만이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등불이 된다. 진리의 등불, 마음의 등불로 오늘의 주인공으로 살 일이다.

    출처 : 향봉 스님(현대불교신문 법문/산골 노승의 화려한 점심) 참고

현생에 주인공으로 살아라.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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