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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과 동행을/💕법문의도량

🍒수행자는 괴로움이 없는, 자유로운 사람

by 이初心 2024. 8. 23.

    불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부처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 즉 깨달은 이의 가르침을 따라서 마침내 깨달음에 이르고자 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를 우리는 수행자라고 하는데, 수행자의 궁극적인 목표는 해탈과 열반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열반이라고 하는 것은 괴로움이 없는 상태, 해탈이라고 하는 것은 자유롭고 걸림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수행의 목표를 ‘괴로움이 없는 사람, 자유로운 사람이 된다’로 잡은 것입니다. 수행자의 궁극적 목표는 해탈과 열반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것을 ‘붓다’라 이름하고 그 길을 가는 자를 보디사트바, 즉 깨달음의 길을 향해 나아가는 중생이다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인생에 있어서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려면 어떤 이치를 알아야 할까요?

    첫째, 인연과보를 알아야 합니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다는 말은 선악의 개념이 아닙니다.
    인연과보와 인과응보를 자꾸 혼돈 하는데, 인과응보라는 것은 권선징악적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나쁜 짓을 하면 나쁜 과보를 받고, 좋은 짓을 하면 좋은 과보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더 한발 나아가 나쁜 짓을 하면 반드시 징벌이 내리고 좋은 짓을 하면 반드시 복이 내린다는 선악의 개념이 들어있는 것, 즉 권선징악적 보복의 원리가 이 인과응보입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인연과보는 그런 권선징악적 선악의 개념이 아니라, 그냥 하나의 원리와 법칙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물건이 있는데 착한 사람이 밀면 움직이고 악한 사람이 밀면 안 움직인다는 이런 원리가 아니고, 힘이 가해져야 움직이고 힘이 가해지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다는 원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악한 사람도 힘을 가하면 움직이게 되고, 선한 사람도 힘을 가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인연과보와 인과응보를 자꾸 혼돈하기 때문에 많은 의문이 생기는 것입니다. 저놈은 나쁜 짓을 많이 하는데 왜 저렇게 부자로 잘삽니까? 저 사람은 착하게 사는데 왜 저렇게 가난하게 삽니까? 자꾸 이렇게 권선징악적 원리로 바라보게 됩니다.

    인연과보라는 것은 돈을 빌렸으면 돈을 갚아야 하고, 돈을 갚기 싫으면 돈을 빌리지 않으면 된다는 뜻입니다. 착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돈을 빌렸으면 갚아야 하고, 악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돈을 빌리지 않으면 돈을 갚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옳고 그르고 선하고 악하고 하는 주관적인 것에 의해서 움직이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자꾸 인과응보적 관점에서 사물을 보기 때문에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면 반드시 나는 사랑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빠지게 됩니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면 사랑받을 확률이 높다 라고는 말할 수 있지만 반드시 사랑받는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기대하는 마음을 내면 실망이 따르고, 기대하는 마음을 내지 않으면 실망이 따르지 않는다, 이것이 인연과보입니다. 인연과보는 반드시 성립하는 법칙입니다.

    우리는 자꾸 선악에 따르는 보상의 원리를 자꾸 생각합니다. 중생은 좋은 일은 안 해 놓고 보상은 많이 바라고 나쁜 일을 해 놓고도 벌은 조금 받으려고 하는 좀 허황된 생각을 한다면, 현명한 사람은 좋은 일을 하고 충분한 보상을 받으려고 하고 나쁜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벌은 받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괴로움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길은 아닙니다.
    괴로움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길은 인연과보를 믿기 때문에 복을 지었으면 복은 반드시 오기 때문에 복을 바라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복을 지었으면 그냥 하나의 법칙으로 언젠가 돌아오게 되기 때문에 이 바라는 마음을 놓아버리는 것입니다.

    이 바라는 마음은 투자에 대한 이익을 바라는 것과 같은 이기심이기 때문에 고를 불러옵니다. 내가 잘못된 인연을 지었으면 반드시 그에 따른 결과가 나타나는데 우리들 대부분은 그것을 피하려고 합니다. 빚을 졌으면 기꺼이 갚는다 하는 것처럼 기꺼이 받아들일 때 그 나쁜 과보가 돌아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나쁜 과보가 일어나더라도 내가 괴롭지 않다는 것입니다.

    인과응보는 원하는 것은 일어나고 원하지 않는 것은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우리들의 욕구에 따른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인연과보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그런 것을 따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냥 인연과보로써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날씨가 늘 봄날이기만 바라고 겨울도 싫고 여름도 싫다가 아니라, 봄은 봄대로 좋지만 여름이라고 해서 특별히 싫어하지 않고 겨울이라고 해서 특별히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그것이 잘 되면 좋지만 안 된다고 꼭 나쁜 것은 아닙니다.

    안 되는 것이 오히려 나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고, 길게 보면 유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에게 닥친 일들, 즉 경계에 끄달리지 않습니다.

    즐거움에 탐착하기 때문에 괴로움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방법이 지금까지 잘못되었습니다. 그래서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온갖 행동들이 도리어 괴로움을 더 증가시키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부처님의 법을 만나서 이 괴로움이 좀 줄어들었는데, 그런 경험들을 하면서 여러분은 불법에 환희심을 내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여러분들에게는 즐거움에 대한 갈구가 있습니다.
    수행정진 한다고 즐거움이 충만 하는 건 아닙니다.
    괴로움을 버리는 것은 쉬운데, 즐거움에 대한 갈망을 내려놓는 것은 오히려 더 어렵습니다.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데까지는 많은 진척이 있다가 그게 어느 정도 고비를 넘기면 마음에 평정심이 도래하는데, 이 들뜨는 즐거움에 집착하므로 평정심은 별 재미가 없으니까 약간 자기 삶이 정체되는 것 같고 무기력한 것 같습니다.

    그 욕망의 갈증이 해소되지 않기 때문에 만족하지 못하고 다시 그 갈증을 채우려고 하다가 다시 또 괴로움을 만나게 됩니다. 수행에 진척이 있으려면 이 즐거움에 대한 갈망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괴로움과 즐거움은 떼어질 수가 없이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굴러다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즐거움마저도 함께 놓아버려야 합니다. 중생이 이렇게 괴롭다 하면서 괴로움에 못 벗어나는 이유는 즐거움에 대한 탐착을 내려놓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좋은 일이 있기를 바라고 나쁜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지만, 해탈과 열반으로 나아가려면 좋은 일도 흥분하지 말고 받아들이고 나쁜 일도 너무 거부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이 내가 원하는 일이든 원하지 않는 일이든 담담히 받아들여라.
    좋은 일을 하더라도 그것을 보상심리로 바라지 마라.
    좋은 일은 하되 보상을 바라지 마라.
    좋은 일을 하는 그것이 곧 복이다,
    이런 얘기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해탈과 열반으로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좋은 일은 하되 기대하지 말고, 나쁜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하되 나쁜 일을 했다면 그 과보를 기꺼이 받으려고 해라. 지은 인연의 과보는 피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것이 공덕이면 공덕으로, 그것이 빚이면 빚으로, 기꺼이 받겠다는 마음을 내는 것입니다.

    빚을 기꺼이 받겠다는 마음을 내기 때문에 빚이 더 이상 나에게 괴로움이 안 됩니다. 그래서 인연법을 떠나 괴로움이 없는 세계에 이르게 됩니다. 이렇게 인연과보의 원리에 따라 살게 되면 죽고 살고 이런 것에 구애받지 않게 됩니다. 우리는 어떤 일의 결과를 계산하게 되는데 그 계산을 놓아버리게 됩니다.

    아직 우리에게 남아있는 건 좋은 일했으면 좋은 결과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놓아야 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마음을 내면 기쁨이 생기고, 내가 미워하는 마음을 내면 괴로움이 생긴다, 이것이 인연과보의 원리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3년 기도 회향을 하면서 수행이 더 깊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인연과보를 믿는다는 것은 상식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상식도 뛰어넘어야 합니다.
    불법은 많은 이치와 원리를 설명하지만, 해탈의 궁극적인 목표는 그 이치를 뛰어넘는 것입니다.

    범부중생의 삶은 인연과보를 모르는 무지의 삶이라면, 현명한 삶은 인연과보의 원리를 잘 아는 이치적인 삶입니다. 그러나 해탈과 열반은 이 인연과보도 뛰어넘어야 합니다. 인연과보에 구애받지 않아야 한다. 여기까지 가야 우리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해탈과 열반이라는 경지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출처: ??^*^
    출처: 향상일로님 글에서

수행자는 괴로움이 없는.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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