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는 숨어 있지 않고 드러나 있습니다.
물처럼 공기처럼 자갈처럼 우리네 주변에 널려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진리와 한 몸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집착의 병을 앓고 있기 때문입니다.
욕심은 버릴수록 아름답고 집착은 키울수록 병이 되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일상생활에 젖어 집착의 병을 앓고 있기 때문에 드러난 진리와 하나를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천수경》 첫 시작이 맑은 정(淨)자 입 구(口)자 지을 업(業)자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이 《천수경》 첫머리에서 구업(口業)을 맑게 하는 것이 수행의 첫째 덕목에 속한다, 즉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 가운데 입으로 짓는 업이 지중하므로 부처님께서는 《천수경》의 첫머리에 구업을 맑게 하라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 견해는 이와 다릅니다.
코밑의 입만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견해입니다.
눈은 보는 입입니다.
귀는 듣는 입이고, 콧구멍은 냄새 맡는 입이며, 배꼽 밑의 두 개의 생식기는 배설하는 입입니다.
우리가 극장이나 공원 같은 곳에 가면 코밑의 입이 아닌데도 입구(入口)․출구(出口)라고 쓰여 있습니다. 제가 중국에서 7년 동안 머물면서 중국 고어를 전공했는데 입 구(口)라는 뜻은 열리고, 뚫리고, 위아래로 통하고, 막힘없이 흐른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저 사람 나쁜 놈이야’하고 했을 때는 구업이지만, ‘저 사람 나쁜 놈이야’라고 결정한 것은 의업입니다. 또 ‘저 사람이 나쁜 놈이기에 한 대 때린 행위’는 신업을 짓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구의 삼업은 중생들의 근기에 맞춰 세 가지로 구분했을 뿐 신구의 삼업은 하나입니다. 이처럼 열린 안목으로 불교의 경전에 접근하고 그렇게 해석해야 합니다.
해인사에 모셔진 팔만대장경은 새의 두 날개처럼, 수레의 두 바퀴처럼 두 개의 축으로 이뤄졌는데 하나는 연기 법칙이고, 또 다른 하나는 중도사상 입니다. 그러므로 중도사상을 바르게 인식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가운데 중(中)자, 길 도(道)자 중도를 실천하는 데 있어 좌로 기울어져서도 안 되고, 우로 치우쳐서도 안 됩니다. 균형과 조화로운 삶을 사는 방법을 부처님이 우리에게 일깨워준 것이 중도의 바른 이해라는 수준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중도를 설명하기 위해 질문을 던지겠습니다. 동서남북 사방 가운데 과연 동쪽은 어디입니까? 내가 서 있는 곳을 중심으로 해 뜨는 방향이 동쪽이고, 서쪽은 내가 서 있는 곳에서 해가 지는 방향입니다. 남쪽과 북쪽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서 있는 곳은 동서남북의 중앙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불교를 믿는 것은 행복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행복은 어디서 옵니까. 진리가 먼 곳에서 오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음지․양지 구분 없이 내가 서 있는 곳에서부터 동서남북이 나누어지듯이 행복도 내가 오감에 의해서 스스로 만족할 때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일생에 있어 최고의 황금기는 바로 오늘입니다.
지금 서 있는 곳이 세상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지나간 과거에 연연할 필요가 없고, 다가올 미래에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있는 곳이 세상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태어나자마자 외치신 소리가 천상천하(天上天下) 유아독존(唯我獨尊)입니다. 그리고 45년 동안 부처님께서 설법하신 내용이 즉심시불(卽心是佛), 즉 ‘마음이 곧 부처다 ’입니다.
중국의 임제(臨濟) 선사가 말씀하신 수처작주(隨處作主)는 ‘어느 곳에 처하더라도 네가 세상의 중심에 서 있는 주인인 줄 알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중도라는 것은 좌로 기울고 우로 기울지 않도록 해서 균형과 조화롭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중도에 대한 바른 해석은 동서남북의 중앙에 항시 내가 서 있다는 것입니다. 즉 내가 세상의 중심인 것입니다.
중도는 ‘나는 항시 세상의 중심에 있다’는 것이며, 이에 따라 행복도 불행도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입니다. 부처님은 위대한 스승이고, 우리는 위대한 스승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는 제자입니다.
불제자들은 항상 마음이 열려 있어야 합니다.
내 마음이 열려야 세상이 열린다는 것을 부처님이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불제자들은 마음이 열려 있더라도 마음을 제대로 쓸 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마음을 어떻게 써 나가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내 마음이 열리면 내 생각이 바뀌고, 내 생각이 바뀌면 운명이 바뀝니다. 내 마음이 열려야 세상이 열립니다. 경전에 보면 ‘열반을 성취하게 되면 윤회가 끊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육도윤회에 대한 시각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살아생전에 우리는 끊임없이 육도윤회(六度輪廻) 하는 존재입니다.
내 마음이 열려 있을 때는 천사도 되고 닫혀 있을 때는 아귀도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끊임없이 일생의 윤회만 하는 것이 아니고 이 자리에서도 윤회하는 존재입니다.
당생(當生)에 윤회하는 존재입니다.
내생에 정토에 태어나길 바라는 것은 바른 불자들의 자세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살아생전에 가정, 이웃 등을 위해 마음을 제대로 써야 합니다. 불교에는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가 있는데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일체개고(一切皆苦) 삼법인(三法印)입니다.
그런데 깨닫고 보면 즉, 열반을 성취하고 보면 육도윤회는 영원히 끊길지 모르지만, 열반의 4덕〔상(常), 낙(樂), 아(我), 정(淨)〕을 누리게 됩니다.
깨닫고 보면 제행은 무상한 것이 아니라 유상(有常)한 것입니다.
하나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열린 마음으로 보면 제행은 무상이 아니라 유상인 것입니다.
일체가 괴롭다고 하지만 내가 마음만 열리면 일체가 즐거움입니다.
내 마음이 흐려 있을 때 모두가 괴로움이지만, 마음이 열려 있을 때는 모두가 쾌락입니다. 제법은 무아가 아니라 유아(有我)입니다. 마음이 열리면 하나하나가 모든 것이 내 모습입니다.
우리들 스스로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마음이 열렸느냐, 닫혔느냐에 따라 육도윤회도, 제행무상도, 제법무아도, 일체개고도 180도로 달라지게 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예토(穢土)라고 하는데 마음만 열면 정토(淨土)가 되는 것입니다. 일상생활을 하는 데 있어 생각을 바꾸고 마음을 열고 살아야 합니다. 오늘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습니다.
참 법당은 마음속에 있기에 마음을 열고 살며, 그리고 그 삶에 고마워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면 모두가 행복해지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