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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함경 이야기 1

by 혜명(해인)스님 2018. 7. 2.


-아함경 이야기 1-
    아함경 이야기1

    1. 그 사람, 1. 석가족. 대왕이시여,

    저 히마반트(雪山)의 기슭 예전부터 코사라 국에 속하는 땅에 재물과 용맹을 아울러 갖춘 한 단정한 부족(部族)이 삽니다. 그들은 ‘태양의 후예’라 일컬어지고 내 생족(生族)의 이름은 사캬, 대왕이시여, 나는 그 집에서 나와 수도자가 되었습니다.

    온갖 욕망을 좇고자 했음이 아니라. (「經集」 3:1 出家經) 기원전 5세기경, 히말라야 기슭의 고원 지대, 오늘날의 네팔의 타라 이 지방에 카피라바투(Kapilavatthu)라고 불리는 조그마한 도시가 있었다.

    중국의 역경자들이 ‘가비라위(迦毘羅衛)’라고 번역한 고장이다.
    붓다는 이도시를 중심으로 해서 살던 사캬 족의 크샤트리아(Ksatriya) 집안에서 태어났다.
    즉 왕족 계급이었으며, 고타마(Gotama)가 그 이름 이었다. 그러기에 경전은 자주 ‘사캬 족의 아들 고타마(Gotama Sakya- putta)’라고 붓다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는 스물 아홉 살쯤 되었을 때, 집을 나와서 사문(沙門)이 되었다.

    그는 곧 갠지스 강(恒河)을 건너 남방에 있는 마가다(Magadha) 국으로 갔다.
    마가다 국은 당시 신흥 국가여서 모든 면에 활발한 생기가 돌았 으며, 그 수도 라자가하(王舍城,Raja-gaha)에는 자연히 새로운 사상가 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도 또한 그곳에 가서 새로운 사상속에서 진리 를 찾고자 한 것이겠다.

    한 경(「경집」 3:1 출가경)은 그 무렵어느 날의 붓다에 대하여 다음 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붓다는 성도(成道)하시기 전 마가다 국의 산에 에워싸인 서울로 가셨다.
    참으로 아리따운 상호(相好)에 빛나시며 탁발(托鉢)을 위해 라자가하의 거리로 드셨다.

    ┌───────────────────────────────┐
    │※상호:용모·형상. ‘상’은 드러나게 잘 생긴 부분. ‘호’는 │
    │ 그 세부적인 것. 붓다는 32상·80종호를 갖추었다 한다. │
    │※탁발:집집마다 다니면서 먹을 것을 얻는 것. │
    └───────────────────────────────┘

    사문이란 팔리 어의 사마나(Samana), 또는 산수크리트의 슈라마나 (Sramana)의 음사(音寫)이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그 무렵의 새 사상가 와 수도자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들은 모두 집에서 나와 전통적인 사 회의 구속을 벗어난 다음, 자유로이 행동하고 사색하면서 하루하루의 생활은 전적으로 탁발과 공양(供養, 음식이나 옷 같은 것을 붓다나 수 도하는 사람에게 바치는 것.)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 날이 ‘사캬 족의 아들 고타마’도 역시 사문의 이런 관행에 따라 라자가하의 거리에 나타나서 탁발을 하고 있었다. 그 때 그의 모습을 눈여겨 바라보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이 나라의 왕인 빔비사라 (Bimbisara)였다. 왕은 높은 다락에서 넋을 잃은 듯 바라보다가, 이윽 고 주위를 돌아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경전은 그 전문을 게(偈, 불교의 이치를 나타낸 운문.)로 기록하고 있거니와, 그것을 산 문으로 바꾸어 놓으면 다음과 같은 말이 된다. “모두들 저 사람을 똑똑히 보아라. 의젓하지 않은가! 그 용모와 행동거지로 볼 때, 아마 천한 출신은 아닌 것 같구나. 곧 누가 가서 저 사람 있는 곳을 알아 가지고 오너라.” 명을 받은 사신은 그 뒤를 밝았다.

    그 사람은 탁발을 마치자, 교외에 있는 ‘판다라’라는 산의 동굴로 돌아갔다. 그 산은 라자가하를 에워 싼 다섯 산 중의 하나이다. 그런 산들이 둘러싸고 있는 까닭에 ‘산에 에워 싸인 서울(Giribbaja)’이라고 하는 것이다.

    “대왕이시여, 그 사문은 판다바의 전면에 있는 암굴 속에 호랑이 처럼 소처럼 사자처럼 앉아 있더이다.” 이 말을 들은 왕은 직접 동굴로 그를 찾아갔다. 그리고 마주앉아 ‘즐거운 인사’를 나눈 다음, 이렇게 말을 걸었다. 그대는 젊도다, 늙지 않았고 양양한 전도를 지니고 있도다. 꽃 같은 청춘이 그대 것이요 유서 있는 가문에 태어난 듯하도다.

    나는 주리니 바라는 녹(祿)을. 그대여 오라 코끼리 떼 앞세운 내 막강한 군대에 참가하라. 나는 묻노니, 그대여 내력을 말하라.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붓다는 크샤트리아 출신이다. 어엿한 왕족·무 사의 가문이다. 지금은 삭발하고 가사를 걸쳐 사문의 몸이 되어 있거니 와, 타고난 의젓함은 아직도 그 몸에 넘치고 있었으리라. 왕은 벼슬하 기를 권하며 그 내력을 물었던 것이다.

    이에 대한 대답이 앞에 인용한 두 절로 된 운문이다. 거기에는 사캬 족 이야기가 나온다.
    히마반트의 기슭에서 사는 한 부족이라고………. 히마반트란 눈으로 덮인 산이라는 뜻으로 지금의 히말라야를 말한다. 그 고장은 또 예전부터 코사라 국에 속해 왔다고도 설명되고 있다. 여 기서 ‘속하는’이라고 번역한 것은 팔리 어로는 niketa 라고 하여, ‘그 휘하에’라는 뜻이다. 이 말을 통해 우리는 사캬 족의 정치적 위 치가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다. 또 거기에는 부족의 칭호로서‘태양의 후예’라는 말이 나와 있고, 생족의 이름은 ‘사캬’라고 한다는 것이 설명되어 있다.

    아마도 사아캬(Sakiya) 또는 사캬(Sakya)는 코리아 (拘利, Koliya)족과 함께 ‘태양의 후예(Adicca-bandhu)’라고 불리는 부족에 속하는 포족(胞族, phratry)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어쨌든 사캬 족이라는 이름은 붓다 - 사캬 족의 아들 고타마 -로 말 미암아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다. 당시 사람들은 붓다를 일컬어 ‘사캬 족에서 나와 출가한 사문’이라고 하거나, ‘가캬 족의 아들인 사문 고 타마’라고 했다. 우리 후세 사람들도 이 분을 우러러서 석가모니(釋迦牟尼, Sakyamuni;석가족에서 나온 성자)또는 석존(釋尊)이라고 일컫는다.

    이런 명칭에 의해 사캬 족의 이름은 불교의 문헌뿐 아니라 널리 일 반에게까지도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캬 족 저체에 대해서는 아주 조금 밖에는 알 수가 없다. 또 후세 사람들이 사캬 족에 관해 기록한 것들은 그 진상이 심하게 왜곡되어 있어서 신빙성이 없다. 다행히도 여기에 붓다 자신에 의해 설 해졌다는 2절의 게가 전해 오므로, 이 성자를 낳은 부족에 대한 믿을만 한 소식을 그나마 들을 수가 있는 것이다.

    아함경 이야기2 1. 그사람. 2. 정각. 일구 월심 사유하던 성자에게 모든 존재가 밝혀진 그 날, 그의 의혹은 씻은 듯 사라졌다. 연기(緣起)의 도리를 알았으므로. (『自說經』 1:1 菩提品) 사캬 족의 아들 고타마는 마가다 국에 머물면서 7년 동안이나 인생의 근본 문제를 해결 하고자 온갖 정성을 다 바쳤다.

    그런 끝에 라자가하 (王舍城)에서 그리 멀지 않은 우루베라의 네란자라 강(尼連禪江)기슭에 있는 핍파라(pippala) 나무 밑에서 마침내 그는 크게 깨달을 수가 있었 다. 이런 인연으로 말미암아 그 나무를 보리수라고 부르게 되었고, 그 깨달음을 보리수 밑의 정각(正覺) 또는 대각 성취(大覺成就)라고 일컫 는다. 그것은 그의 생애에서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그와 아울러 불교의 모 든 흐름이 그 순간에 결정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면 그것은 어떻 게 하여 이루어졌느가? 또 어떤 사상을 내용으로 하고 있는가? 무릇 불 교에 대해 관심과 흥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자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을 이제 나는 새로운 시 각에서 구명해 가고자 한다. 여기에서 내가 취택한 한 경전(「자설경」)은 그 결정적 순간의 그의 모습과 생각을 묘사한 다음 앞에 든 운문으로써 끝을 맺고 있다. 나는 그 운문을 될 수 있는 대로 직역해 놓았거니와, 그것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열심히 사유하는 성자에게 삼라 만상이 그 진상을 드러냈을 때 의 혹이 모두 사라졌다는 점이다.

    주의해서 읽어 보면, 여기에 불교의 진 리에 대한 견해가 명료히 나타나 있음을 느끼게 된다. 이를테면 ‘무명(無明)’이라는 말을 음미 해 보자. 이 말의 원어는 avijja 이며, 그것은 무지 · 미망을 나타내는 말이거니와, 그것을 표 현하는데 ‘무(蕪)’를 뜻하는 ‘a’와 ‘명(明)’을 뜻하는 ‘vijja’ 를 연결했다는 것은 무지(無智)란 곧 진상이 밝혀지지 않은 상태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후세의 불교 문헌들은 이런 생각을 “광명이 오면 어 둠이 사라진다.”는 비유적 표현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이를테면 『사 십이장경(四十二章輕)』의 일절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붓다께서 말씀하셨다.“대저 도(道)를 봄은 마치 횃불을 가지고 어두 운 방에 들어갈 때,그 어둠이 없어지고 광명만이 남는 것과 같으니라.” 또 후세의 선승들이 말하는 것을 들으면, 지관 타좌(只管打坐; 선종 의 말. 오직 앉는 것 뿐이라는 뜻. 즉 좌선에 임해서 깨닫겠다든지 무엇을 해결하겠다든지 하는 노력을 떠나, 무심히 그저 앉아 있을 때 그 것이 도리어 참된 경지가 된다는 뜻.)하여 신심 탈락(身心脫落;몸과 마 음에 대한 집착을 완전히 떠나는 것.)할 때, 꽃은 붉고 버들은 푸르러 서(도홍유록(桃紅柳綠)에서 나온 말; 진리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이 바로 진리라는 뜻. ‘색즉시공 공즉시색’과 같은 말.) 삼라 만상은 그 진상을 있는 그대로 나타내 보인다고 한다. 이런 것이 불교를 일관하는 진리관이다. 이것은 고독한 사색가가 그 머리 속에서 얽어 낸 종류와는 다르다.

    또는 흥분한 예언자가 갑자기 하늘로부터 계시를 받은 것과도 다르다.
    오직 사람이 아무것에도 가리 어지지 않은 눈을 뜨게 될 때, 일체의 존재는 있는 그대로 그 진상을 우리의 눈앞에 드러내 보인다는 것이다. 이것이 제법 실상(諸法實相;모 든 존재의 진실한 모습.)이며, 이것이 불교의 진리관이거니와, 이런 진 리의 관념은 결코 불교만의 것은 아니다.

    그리스 사상가들이 말하는 진 리의 관념도 이와 비슷한 점이 있다. 그들은 진리를 ‘알레테이나 (aletheia)’라는 말로 나타냈다. 그것은 ‘덮여 있는 것(letheia)’에 부정의 접두사‘a’를 붙인 것이어서,‘덮여 있지 않은 것’을 뜻한다. 거기서도 역시 가려 있지 않은 존재의 진상이야말로 진리라고 생각되었 음이 분명하다.

    그러면 대체 사캬 족의 아들 고타마는 어떻게 함으로써 가려지지 않 은 눈을 얻었고, 어떻게 함으로써 존재의 진상 앞에 설 수 있었던 것일 까? 이에 대해서도 과거에는 보리수 밑의 결정적인 순간에만 마음을 빼 앗긴 나머지, 7년에 걸친 긴 수행 기간을 별로 돌아보지 않았던 것 같 다. 내가 이제 새로운 시각으로 이것을 구명해 보겠다고 하는것은 마 지막의 크나큰 해결에 초점을 맞추면서, 다시 한 번 이 장기에 걸친 수 행을 돌아보자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긴 수행 기간은 내 관점에서 본다면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그 첫째는 출가의 단계이다. 오래 된 경전은 자주 "집에서 나와 집 없는 사문이 되었다."는 말을 쓰고 있다. 그것은 가정 생활을 버리는 것과 함께 가사를 걸치고 사문으로서 살아감을 뜻하는바, 그 속에는 적어도 두 가지 포기가 포함되어 있다. 그 하나는 풍족한 가정 생활의 포기요, 또 하나는 고귀한 사회 생활의 포기이다.

    고타마의 가정 생활은 부유하 고 행복했으며, 그 사회적인 신분은 크샤트리아에 속해 있었다. 만약 마음만 있었다면 정치적으로 높은 지위에 오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 러한 모든 것을 자진하여 버렸다는 것은 쉽지 않은 포기였음이 분명하 다. 유럽의 불교 학자가 고타마의 출가를 번역하면서, 자주 ‘크나큰 포기(the great Renunciation)’라는 말을 쓴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 ‘크나큰포기’에 의해서 그는 우선 가정과 카스트 (caste ; 사회 계급)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 둘째 단계는 여러 도인들을 찾아 공부한 기간이다.

    오래 된 경전 에는 아라라 카라마(Alara - Kalama)와 웃다카 라마푸타(Uddaka - Rama putta)가 그의 스승이었다고 나와 있다. 그들은 두 사람 다 이른바 육 사 외도(六師外道 ; 붓다 당시의 여섯 명의 사상가. 그것이 정도(正道) 가 아니라 하여 불교 쪽에서 이렇게 부르는 것.)에는 들어 있지 않으 나, 그들 또한 그 당시 마가다 국을 중심으로 활약했던 새 사상가들이 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낡은 사상의 계보에 속하는 바라문(‘바 라문’를 가르킴이니, 인도 고대의 정통적인 종교. 절대자인 브라만과 자아인 아트만의 합치를 주장했다.)을 찾았다는 기록은 전혀 안 보이므 로, 그가 어디까지나 새로운 사상의 조류 속에서 호흡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학문이나 사상의 세계에서는 스승도 또한 넘어가지 않을수 없 다. 제자가 언제까지나 ‘스승의 제자’로서 멈추어 있어서는 사상의 새로운 전개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고타마는 차례차례 어느 스승이나 버리고 지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자기 혼자의 힘으로 길을 개척해 가고 자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그것 또한 보리수 밑의 정각에 이르는 필연의 과정이었다고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정각을 향한 길이 곧바로 열린 것은 아니었다. 그 의 앞에는 아직도 넘어야 할 고개가 가로놓여 있었다. 스승의 곁을 떠 난 고타마는 꽤 오랫동안 고행에 의해 목적을 달성해 보려 애썼다. 고 행이란 육체를 약화시킴으로써 정신의 힘을 높일 수 있다는 사고 방식 에서 나온 수행이다.

    고대에는 어느 민족이나 이런 경향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심했던 것이 인도인이었다. 그것은 그들의 고질이라 해도 좋을 것이어서, 현재도 이러한 병폐는 그들 속에 남아 있는것 같 다. 그는 여러 가지 고행을 했다. 또 누구보다도 열심히 그것을 행했다. 그러나 뛰어난 경지는 아무리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의 손발은 겨릅처럼 바짝 야위어 갔다. 뱃가죽은 등에 닿을 정도였다.

    그래서 그 는 ‘깨달음에 이르는 데는 아마 다른 길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 기에 이르렀다. 고행이 정각에 이르는 정당한 방법일 수 없음을 간파( 看破)했던 것이다. 그는 드디어 고행을 버리고 우유로 쑨 죽을 먹고 또 밥도 먹었다. 그 것은 매우 중대한 단계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행에 신비한 힘이 깃들 어 있다고 믿었던 고대 사회에서 그 불합리성을 확인하고 그로부터 탈 출한다는 것은 오늘의 우리가 상상조차 못할 만큼 어려웠을 것이다. 지 금껏 그에 대해 찬탄해 마지않던 사람들도 그가 고행을 중지한것을 보 고는, 타락했느니 사치해졌느니 하며 경멸의 눈초리를 보내 왔다.

    그런 속에서 그는 다시 한 번 체력을 회복하여 마가다 국의 여기 저기를 순 회한 다음, 우루베라의 네란자라 강 기슭에 이르러 그 보리수 밑에 풀 을 깔고 앉았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그 자리에서 크나큰 진리를 깨달을 수 있었다. 후세의 불교인들은 그가 깔았던 풀을 ‘길상초(吉祥草)’라 부르고, 그 않았던 자리를 ‘금강좌(金剛座)’라고 일컬었다.

    그리고 그가 여기 에 앉은 다음부터 대각을 성취하기까지의 기간은 그리 길지는 않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 하면 미망 즉 가려져 있던 것들은 이미 차례차 례로 제거되고 말아, 그 자리에 앉은 사캬 족의 아들 고타마의 눈을 가리는 것이라고는 이제는 아무것도 없었던 까닭이다.

    오래 된 경전은 흔히 이사실을 "눈이 생기고 지혜가 생겨"라고 표현하고 있거니와, 이 리하여 가려진 것들이 제거됨으로써 활짝 열린 눈앞에 존재가 그 진상 을 드러내 보일 준비는 이미 되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보리수 밑에서의 정각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 알고 자 하는 사람은 오직 저 결정적인 순간에만 넋을 빼앗겨서는 안되리라 .

    오히려 눈을 돌려 거기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고, 어떠한 장 애물이 그의 눈으로부터 제거되었는지를 고요히 생각해야 할 줄로 아는 바이다. 아함경 이야기3 1. 그사람. 3. 보리수 밑에서의 생각. 고생 끝에 겨우겨우 얻은 이것을 어이 또 남들에게 설해야 되랴. 오, 탐욕과 노여움에 불타는 사람에게 이 법을 알리기란 쉽지 않아라. 세상의 상식을 뒤엎은 그것 심심 미묘하니 어찌 알리오. 격정에 매이고 무명에 덮인 사람은 이 법(法)을 깨닫기 어려우리라. (『相應部經典』6:1 勸請) (상응부경전) (권청) 보리수 밑에서 진리를 깨달은 다음에도 붓다는 얼마 동안을 그 고장 에 머물렀다.

    그 기간은 아마 몇 주일에 지나지 않았으려니와, 그 동안 붓다의 가슴을 오고 간 생각 중에는 참으로 중대하고 흥미 진진한 것들 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첫째 것은 깨달은 내용을 마음속에서 반복 음미하여 정리해 간일 이다. 그때 붓다의 가슴속을 한마디로 표현해 본다면 ‘지혜의 즐거움’ 으로 꽉 차 있었다고 할 수 있으리라. 사람으로서 맛볼 수 있는 즐거움 중에서 최고의 것을 찾는다면 그것은 역시 지혜에서 오는 즐거움일 터 이다. 그것은 제한 없는 즐거움이요,

    순수한 즐거움이요, 또 고요한 즐 거움이다. 경전은 그 당시의 붓다에 대하여 처음으로 정각(正覺)을 성취하신 세존(世尊 ; 붓다를 일컫는 열 가 지 이름 중의 하나.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분이라는 뜻.)께서는 우루 베라의 네란 자라 강 기슭에 있는 보리수 밑에서 결가부좌( 오른발을 왼쪽 넓적다리 위에 놓고, 왼발을 오른쪽 넓적다리 위에 놓고 앉는자 세. ) 하신 채, 이레 동안 해탈의 즐거움을 맛보시면서 앉아 계셨다. 고 기록하고 있다.

    그 고요한 즐거움은 이 담담한 표현의 행간에서도 배어 나오는 듯 느껴진다.
    붓다 정각의 사상적인 내용은 앞에 든 『자설경』의 게에 의하건대 연기의 법칙(sahetu dhamma)이었다고 한다. 그 상세한 것은 뒤로 미루 겠으나, 단적으로 말한다면 그것은 관계성의 법칙이요, 사의성(相依性) 의 법칙이며, 원인 · 결과의 법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이렇게 법칙성의 것이라면 그것을 사실에 맞추어 보아서 그것이 진리인 지 아닌지를 검토해야 했을 것이다. 그로부터의 며칠 동안을 붓다는 이 런 음미로 소일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런데 일체의 존재는 남김없이 이 법칙에 의존하고 있음이 판명되었다. 다시 이것을 인간 존재에 적용 시켰더니 그것 역시 환히 풀렸다. 이리하여 ‘지혜의 즐거움’은 마치 샘물처럼 끝없이 솟구쳐 나왔던 것이겠다. 그러나 이런 어느 날 붓다의 가슴속에는 생각하지도 않았던 불안이 그림자를 나타냈다. 경전은 그것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참으로 존경할 데가 없이 사는 것은 괴롭다. 나는 어떤 사문이나 또는 바라문을 존경하고 의지하면서 살아야 되는 것일까?" 그것은 참으로 이상한 생각이다. 특히 후세의 불교인들의 상식에서 본다면, 정각을 성취한 붓다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될 것이 다. 왜냐 하면 그 말이 뜻하는 바는 존경하고 섬길 사람이 없는 생활은 괴롭다는 고백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예로부터 이 경(『상응부 경전』 6:2 공경. 한역 동본, 『잡아함경』44:11 존중)을 문제 삼은 사람은 아 무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잘 음미해 보면 거기에는 중대하고 미묘한 계기가 포함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종래의 불교인들은 그것을 바로 보지 못한 것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사람은 이 세상에서 혼자 살아가지는 못한다.
    물질 면에서도 그러려 니와 정신적으로도 마찬가지이다. 사랑 · 동정 · 공명 · 이해, 이런 것들이 없다면 이 세상은 사막처럼 쓸쓸해지고 말 것이다. 문학이니 예 술이니 사상이니 하는 것도 혼자서라면 처음부터 존재할 의미가 없어진다.

    비록 어떤 기막힌 사상이 어느 사람의 머리 속에 떠올랐다고 해도, 그것이 남에게 표현 · 전달되고 이해되지 않는다면, 마침내 그것은 무 와같은 것이 될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아니 그것이 표현에 의해 객관 화됨으로써 누군가에게 이해될 때 비로소 사상이 생겨나는 것인지도 모 른다. 왜냐 하면 인간과 인간의 세계가 그렇게 되어 있는 까닭이다. 이제 붓다는 가리는 것이 없는 눈으로 일체 만유의 진상을 꿰뜷어 보 았다. 그것이 정각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그 한 사람의 가슴속에 간 직되어 있을 뿐이다.
    이른바 내증(內證 ; 내적 체험)이다. 그 내증을 가만히 맛보고 고요한 즐거움에 잠기면서도 그는 갑자기 이상한 불안을 느꼈던 것이다. 만약 자기와 같은 사상을 지니고 있는 사문이나 바라문이 어딘가에 있다면, 그에게 찾아가서 함께 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아무 데도 없는 것을 어쩌랴.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의지할 것이라고는 스스로 깨달은 법(진리)밖에는 없지 않 은가! 그것을 객관적으로 표현하여 누군가의 이해를 구하는 것, 그것만 이 인간 고타마에게 남은 단 하나의 길이었다. 이에 전도의 문제, 즉 설법의 문제가 떠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이 장(章)의 첫머리에서 소개한 2절의 운문을 되새겨 주시 기 바란다.
    거기에는 고생 끝에 겨우겨우 얻은 이것을 어이 또 남들에게 설해야 되랴. 라는 구절이 있었다. 붓다는 설법의 문제를 앞에 놓고 우선 주저했음이 명백하다. 이것 또한 후세의 불교인들의 상식으로 볼 때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겨지리라. 왜냐 하면 그들은 붓다가 중생 제도를 위해서 출가했 다고 배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동기와 결과를 엇바꾸고 있음이 분명하다.
    붓다가 출가를 감행했을 때, 그 어깨에 걸머지고 있던 것은 분명히 자기의 문제, 자기의 고민이었다. 최근의 정밀한 연구로 밝혀진 것은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라는 문구가, 바꾸어 말하면 중생 제도를 목적으로 표방하는 말이 비로소 경전에 나타난 것은 훨씬 후대 의 일이라는 점이다. 최초의 설법이 베풀어지고 제자들도 이미 60명으 로 불어나 전도를 위해 그들을 처음으로 떠나 보낼 때, 붓다의 말씀속 에 이 구절이 비로소 나타났던 것이다 .

    이것을 뒤집어 생각하면, 출가 시절에는 말할 것도 없고 드디어 크나큰 해탈에 이르렀을 때에도 아직 이 문제는 상정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이 된다. 그것이 갑자기 설법의 형태로서 문제가 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니, 붓다의 마음이 먼저 부정 쪽 으로 기울어졌던 것도 당연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이것이 그 게의 뜻이 기도 하다. 같은 경에서는 또 그때 세존의 마음은 침묵으로 기울고 설법으로는 기울지 않았다. 고도 말하고 있다.

    그 주저함의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이 앞에 든 운문의 후반 부분의 내용이다.
    만약 법을 설한다 해도 사람들이 과연 그것을 이해할 수 있 을까, 그것이 걱정이었기 때문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것은 붓다가 깨 달은 사상의 내용이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음을 보여 주는 말이 다.

    세상의 상식을 뒤엎은 그것, 심심(深甚)미묘 정세하니 어찌 알리오. 이렇게 어려운데도 세상 사람들은 탐욕과 분노에 사로잡히고 격정과 무명에 덮여 있다. 그렇다면 내가 기껏 설해 보았자 나만 지치고 말리 라, 그것이 붓다의 심정이었던 것이다. 설법이 중요한 문제가 되면서도 이렇게 붓다의 마음은 쉽사리 그쪽으로는 기울지 않았다. 그것을 뒤집어 마침내 설법의 결심으로까지 이끌고 간 소식을 이 경 은 신화적인 수법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른바 ‘범천 권청’의 설화가 그것이다. 범천(梵天)이란 만유의 근원이라는 범(梵), 즉 브라만(Brahman)을 신 격화한 인도의 신이다. 그것이 불교에도 섞여 들어와서 교법 수호의 신 으로서 자주 경전에도 나타나거니와, 지금도 붓다가 설법을 주저하고 있음을 안 범천은 그래서는 세상이 망하리라고 걱정한 나머지 급히 붓 다 앞에 나타나서 권해 마지않았다는 것이다. "세존이시여, 원컨대 법을 설하시옵소서.

    이 세상에는 눈이 티끌로 가려짐이 적은 사람도 있사옵느바, 그들도 법을 듣지 못한다면 망하 지 않겠나이까? 그들은 법을 듣는다면 필시 깨달음에 이르오리다." 그래서 붓다는 다시 한 번 세상 사람들의 모습을 관찰했다. 그때 붓 다의 눈에 비친 세상 사람들의 모습을 경전은 연꽃에 비유하여 아름답 게 서술하고 있다.

    못 속에는 온갖 빛깔의 연꽃이 핀다. 어떤 것은 아직도 흙탕물 속에 잠겨 있는 것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것은 수면 위에 고개를 들고 아름답 게 피어 있다.
    진흙 속에서 나왔으면서도 그것에 조금도 물들지 않은 채 아주 맑은 꽃을 피운다.

    그것과 같이 세상 사람들도 가지 각색임을 관찰한 붓다는 마침내 설법을 결심했다.
    그리고 말했다. 내 이제 감로(甘露)의 문을 여나니 귀 있는 이는 들으라,
    낡은 믿음 버리고. 붓다가 진리를 깨달았다는 것은 불교에서는 가장 중요한 일이다.

    만 일 그 사실이 없다면 오늘의 불교도 있을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깨달음의 내용이 설법의 형식을 통해 객관화되었다는 것도 또한 마찬가지로 중요한 일이다.

    왜냐 하면 이것 없이는 불교가 성립할 수 없는 까닭이다.
    그리고 그런 설법의 결심도 그 보리수 밑에서 차차 익어 갔음을 보았거니와, 붓다는 여전히 그 밑에 앉아서 움직이려고 들 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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