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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佛陀)와 불전(佛傳)-붓다의 열 가지 호칭

by 혜명(해인)스님 2018. 7. 3.


-붓다의 열 가지 호칭-
    붓다의 호칭은 부처님의 위대함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붓다를 지칭하는 이름은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초기경전에서부터 후기 대승경전에 이르기까지 가장 일반적으로 불리는 붓다의 호칭은 열 가지입니다.
       이것을 ‘여래십호(如來十號)’라고 부릅니다. 이 여래십호는 원래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석가모니불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였습니다. 현재 남방 상좌부 불교에서는 지금도 그렇게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는 여래십호가 고유명사가 아니라 불교적인 인격완성자라면 누구에게나 붙여질 수 있는 보통명사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붓다의 호칭은 원래 고유명사였으나, 나중에는 불신관(佛身觀)의 변천으로 제불통호(諸佛通號)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선 불교사전에서는 여래십호를 어떻게 풀이하고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십호(十號): 부처의 열 가지 호칭.
        ⑴여래(如來). 진리에서 온 자, 진리에 이른 자. 진리에 머무는 자.
        ⑵응공(應供). 마땅히 공양 받아야 할 자.
        ⑶정변지(正遍知). 바르고 원만하게 깨달았다는 뜻.
        ⑷명행족(明行足). 지혜와 수행을 완성하였다는 뜻.
        ⑸선서(善逝). 깨달음에 잘 이르렀다는 뜻.
        ⑹세간해(世間解). 세간을 모두 잘 안다는 뜻.
        ⑺무상사(無上士). 그 위에 더 없는, 최상의 사람.
        ⑻조어장부(調御丈夫). 모든 사람을 잘 다루어 깨달음에 들게 한다는 뜻.
        ⑼천인사(天人師). 신(神)과 인간의 스승.
        ⑽불(佛). 깨달은 사람.

        ⑾세존(世尊). 모든 복덕을 갖추고 있어서 세상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자. 세간에서 가장 존귀한 자. 이와 같이 열한 가지이지만 여래를 제외하거나, 세간해와 무상사를 하나로 하거나, 무상사와 조어장부를 하나로 하거나, 불과 세존을 하나로 하여 열 가지로 함.

        위 사전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여래십호가 실제로는 열한 가지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해석은 매우 다양합니다. 붓다의 칭호들은 부처님의 위대한 측면을 부각시키기 위해 붙인 이름들입니다. 붓다의 위덕이 무한하기 때문에 그에 따른 칭호도 무량(無量)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기수(基數, fundamental number)가 극(極)에 이르러 한 자리의 수가 다 찬 ‘십(十)’으로 무량수(無量數)를 상징하는 뜻에서 예로부터 열 가지로 붓다의 무량덕(無量德)을 호칭해 온 것입니다. 즉 십호는 무량수(無量數)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제불통호(諸佛通號)로서의 십호는 모든 부처님에게 호칭될 수 있는 무량칭호(無量稱號)를 가리키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 여래십호는 사실상 열한 가지의 칭호이지만 개(開), 합(合)에 의해 굳이 열 가지로 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십호의 개(開), 합(合)은 경론(經論)에 따라 일정치 않으나 대략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의 경우가 있습니다.

          첫째는 ‘세간해’와 ‘무상사’를 하나로 합하여 십호를 정한 경우입니다.
          둘째는 ‘무상사’와 ‘조어장부’를 하나로 합하여 십호를 정한 경우입니다.
          셋째는 ‘세존’을 빼버리고 십호를 정한 경우입니다.
          넷째는 ‘불’과 ‘세존’을 하나로 합하여 십호를 정한 경우입니다.
          다섯째는 ‘세존’을 ‘여래, 응공, 정변지, 명행족, 선서, 세간해, 무상사, 조어장부, 천인사, 불’의 십호를 갖춘 완성인의 총체적 칭호로 보는 경우입니다.

          이와 같이 중국의 역경승들은 열한 가지를 십호 속에 포함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로 고심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포교원에서 신도교육용으로 편찬한 교재에서는 이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즉 “여기서 불과 세존을 나누고 ⑺과 ⑻을 하나로 헤아리거나, 세존을 제외하고 여래십호라 하기도 하며, 여래를 총체적인 이름으로 하고 불과 세존을 구분하여 여래십호라 하기도 한다.”10)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과거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십호의 내용을 각기 달리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혼란이 생기게 된 까닭은 십호 가운데 ‘여래(如來)’를 포함시켰기 때문입니다. 십호에 대한 해석도 남전(南傳)과 북전(北傳)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북전의 전승에 의하면, ①여래, ②응공, ③정변지, ④명행족, ⑤선서, ⑥세간해, ⑦무상사, ⑧조어장부, ⑨천인사, ⑩불세존으로 되어 있습니다. 북전에서는 ‘여래’를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한편 남전의 전승에 따르면, ①응공, ②정변지, ③명행족, ④선서, ⑤세간해, ⑥무상사, ⑦조어장부, ⑧천인사, ⑨불, ⑩세존으로 되어 있습니다.

            남전에서는 ‘여래’를 포함시키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북전에서는 불과 세존을 합하여 하나로 하였으나, 남전에서는 불과 세존을 구별하고, 그 대신 여래를 제외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여래’는 붓다가 자신을 지칭할 때 사용한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래는 십호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여래라는 호칭은 오직 붓다 자신만이 사용할 수 있는 말입니다.
              이것은 마치 왕이 자기 자신을 지칭할 때 ‘짐(朕)’이라고 표현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실례를 초기경전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한 가지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비구들이여, 緣起란 무엇인가.
              生이라는 緣에 의해 老死가 있다. 如來의 興起와 不興起[出現과 不出現]에 관계없이 그것은 常住의 界이고, 確法이고, 定法이며, 緣起性이다. 이것을 如來는 깨달았던 것이고, 달성했던 것이다. 깨달아 도달하여 설명하고, 가르치고, 說示하고, 廣說하고, 分別하고, 명백히 함으로써 그대들은 그것을 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인도말의 용법을 중국의 역경승들이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여래’를 삽입함으로써 혼란이 생긴 것입니다. 남전의 전승에 따르면, 여래십호는 ‘여래’를 제외한 ①응공, ②정변지, ③명행족, ④선서, ⑤세간해, ⑥무상사, ⑦조어장부, ⑧천인사, ⑨불, ⑩세존입니다.

              그러면 여래라는 말은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는가. 여래(如來)의 원어는 따타가따(tathāgata)입니다. tathāgata는 tathā와 āgata의 합성어입니다. tathā는 ‘이와 같이’, ‘그렇게’, ‘그런 방법으로’, ‘마찬가지로’의 뜻이고, āgata는 오다(來)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여실히 왔다’[如來]는 의미가 됩니다. 즉 진리와 하나가 되어 왔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붓다는 자기 자신을 지칭할 때, ‘如來’(tathāgata)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진리를 자각하고 그 기쁨에 젖어 있던 붓다께서 ‘진리로 들어간 사람’(tathāgata, 如去)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자신의 깨달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설하여 나타냈다고 하는 행위에 의해 비로소 ‘진리로부터 온 사람’(tathāgata) 즉 ‘여래’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여래십호의 칭호에 담겨져 있는 의미를 검토해 보겠습니다.

              ⑴응공(應供, arahant, arhat): 응공이란 사람과 천인[人天]으로부터 공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는 뜻입니다. 초기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이룩한 성자, 즉 성성문(聖聲聞, ariya-sāvaka, 거룩한 제자)을 일컫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붓다도 아라한 가운데 한 명이라고 하였습니다. 나중에는 여래와 아라한을 구별하였습니다.
              한자말의 응공(應供)은 응수공양(應受供養)의 줄인 말입니다. 즉 남의 공양을 받을만한 자격과 실력이 갖추어져 있음을 뜻합니다. 또 진인(眞人), 살적(殺賊), 불생(不生), 지진(至眞) 등이라고 의역(意譯)하기도 합니다. 살적(殺賊)이란 일체의 번뇌의 적을 죽인다는 뜻이며, 불생(不生)은 다음 생을 받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⑵정변지(正遍知, sammā-sambuddha, samyak-sambuddha): 정변지는 정등각자(正等覺者)라고 합니다. 즉 사제(四諦)의 진리를 여실히 통달한 자라는 의미입니다. 즉 고(苦)를 알되 고(苦) 그대로의 모습대로 알며, 집(集)을 알되 집(集) 그대로의 모습대로 알며, 멸(滅)을 알되 멸(滅) 그대로의 모습대로 알며, 도(道)를 알되 도(道) 그대로의 모습대로 알며, 이와 같이 일체의 법을 모두 알아 두루 하지 않음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붓다를 정변지라고 일컫는 것은 ‘완전히 깨달은 자(sammā-sambuddha, 正等覺者)’라는 뜻입니다. 완전한 깨달음이라고 해서, 절대적인 의미의 전지(全知, sabbaññū)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불교의 맥락에서는 ‘모든 것’ 또는 ‘일체(一切, sabbam, 全)’라는 개념의 사용이 극도로 제한됩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경험적으로 주어진 것 내지는 그런 경험적 인식으로부터 추론 가능한 것에 제한됩니다. 완전함이란 염오된 흐름들(āsava, 流漏)의 부재를 뜻하는데, 이런 흐름들 중의 하나가 주관이나 객관 속에서 영원한 절대 본질을 찾아 헤매는 것입니다.

              ⑶명행족(明行足, vijjācaranasampanna, vidyācaranasampanna): 명행족의 명(明)은 지혜, 즉 삼명(三明: 天眼, 宿命, 漏盡)을 알고, 행(行)은 실천, 즉 신(身), 구(口), 의(意) 삼업(三業)을 말하며, 족(足)은 명과 행을 갖추었다는 뜻입니다. 즉 지혜(이론)와 실천을 구족하신 분이라는 말입니다. 부처님은 말씀하신대로 행했고, 행한 대로 말씀하신 분이었습니다. ‘지목행족(智目行足)’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혜의 눈과 행동하는 발’이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명행족을 말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붓다를 명행족이라 일컫는 것은 ‘인식과 행동을 겸비한 자(vijjācaranasam- panna, 明行具足者)’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그가 인식과 아울러 행동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행동이 자신의 인식과 일치했다는 더 의미심장한 사실을 함축하는 것입니다. 붓다는 절대적 인식에 대한 그 어떠한 주장도 거부하기에, 어떤 형태의 절대적인 도덕 원칙도 단언하지 않습니다.

              ⑷선서(善逝, sugata): 선서는 ‘피안으로 잘 건너가신 분’이란 뜻입니다.
              여실히 저 언덕으로 건너가서 다시는 생사고해(生死苦海)에 돌아오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붓다를 선서라고 일컫는 것은 그가 ‘행복해진(sugata, 善逝) 사람’임을 뜻합니다. 이것은 신체적, 정신적 ‘안락’이라고 하는, 인간이 바라는 최상의 행복을 얻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탐욕과 증오와 어리석은 혼란으로부터 야기되는 괴로움에서 벗어나 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인식과 이해와 연민을 통해서 타인에게 헌신하는 생활을 향유해 나갑니다. 그의 삶이란 자기 자신과 타인 모두를 위한 성취인 것입니다.

              ⑸세간해(世間解, lokavidū, lokavid): 세간해를 지세간(知世間)이라고도 합니다. 일체 세간의 온갖 일을 다 아신다는 뜻입니다. 즉 ‘세간을 잘 알고 계신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붓다를 세간해라고 일컫는 것은 그가 ‘세상을 아는 자(lokavidū, 世間解)’임을 뜻합니다. 붓다가 세상을 안다는 것은 가정될 수 있는 모든 수수께끼들을 풀어 낸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형이상학자들은 대부분 세상을 영원불변한 것으로 보거나, 아니면 일관성이 없는 제멋대로인 것으로 봅니다.
              세상에 관한 이러한 단정들에 대해 아는 것 역시 세상을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이론을 내세우는 사람들의 경향이나 습성을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세상의 본성을 탐구하면서 빠질 수 있는 함정에서 벗어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붓다가 세상을 ‘의존적인 일어남(paticcasamuppanna, 緣起)’으로 설명하는 것은 이런 성향들을 가라앉히고 수수께끼와 같은 신비에의 추구를 단념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⑹무상사(無上士, anuttara): 무상사는 ‘가장 높으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두 발 가진 이 가운데 가장 높으신 분, 즉 양족존(兩足尊)을 의미합니다.

              붓다를 무상사라고 일컫는 것은 ‘가장 탁월한(anuttara, 無上) 자’임을 뜻합니니다. 인생의 궁극 목표에 도달한 사람으로서 붓다에게는, 특히 유사한 상태의 도덕적 완성을 이룬 그의 제자들처럼, 자신과 비슷한 수준에 있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보다 우위에 서는 사람이 존재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 놓여 있기 때문에, 그는 모든 인간이 종속되는 최고의 존재자가 있다거나 모든 인간이 따라야 하는 궁극적인 도덕 법칙이 있다거나 하는 것과 같은 두 개의 절대주의적인 단정을 거부합니다. 그가 자신의 제자들과 구분하여 내세우는 유일한 주장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스승(satthā, 師)이라는 사실뿐입니다.

              ⑺조어장부(調御丈夫, purisadamma-sārathi, purusadamya-sārathi): 조어장부는 사람을 잘 길들이시는 분이란 뜻입니다. purisa는 사람을 말하고, damma[damya]는 ‘길들여져야 할’ 대상을 말하고, sārathi는 마부(馬夫) 혹은 조어자(調御者)를 말합니다. 즉 지금의 동물 수련사 혹은 조련사를 사라티(sārathi)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부처님은 사람들을 잘 길들이는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마치 마부가 야생마를 길들이는 것에 비유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붓다를 조어장부라고 일컫는 것은 그가 ‘숙련된 조련사(purisadamma-sārathi, 調御丈夫)’처럼 사람들을 잘 제어하여 길들일 수 있는 자임을 뜻합니다. 비록 그에게는 기적을 행할 능력이 있었지만, 이런 힘들이 그를 출중한 조련사로 만든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를 최상의 조정자로 만든 것은 인간의 심리적 구조에 대한 인식과 아울러 깊은 연민의 감정이었습니다. 앙굴리말라(Angulimāla)와 같은 살인자나 암바빨리(Ambapālī)와 같은 창녀를 잘 제어하여 도덕적으로 타당한 삶으로 이끌어 준 것은 심리적 요법이었지만 마술이나 강압이 아니었습니다. 현대적인 의미에서 보자면 붓다란 최고의 정신과 의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⑻천인사(天人師, satthā-devamanussānam, śāstā-devamanusyānām): 천인사는 천신(하늘)과 인간의 스승이라는 뜻이다. 부처님은 인간세계의 스승일 뿐만 아니라 천상세계의 스승이라는 것입니다. 즉 육도(六道), 사생(四生)의 스승이 바로 붓다인 것입니다.

              붓다를 천인사라고 일컫는 것은 그가 ‘신들과 인간들의 스승(satthā devamanussānam, 天人師)’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계시를 내리는 메시아가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감당하는 짐도 그렇게 엄청난 것이 아닙니다.
              그는 다만 자신이 피땀 어린 정신적, 도덕적 수련 과정을 통해 발견한 것을 다른 이들에게 가르쳐 줄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런 가르침의 여정이 성공적이었기 때문에 붓다의 제자들은 그를 탁월한 지도자의 원형으로 간주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그런 지위에 올려놓는 것을 한사코 거부하였습니다.19) 나아가 그는 스스로를 단순히 안내자라고 표현할 뿐, 자신을 구세주로 여기는 것을 분명하게 부정하였습니다.

              ⑼불(佛, buddha): 불은 ‘깨달으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불타(佛陀)’라고 음사하여 널리 사용하고 있습니다. 붓다라는 말 자체가 곧 ‘깨달은 자[覺者]’라는 뜻입니다. 가장 많이 사용되었지만, 지금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깨달은 자’를 일컫는 보통명사로 더 많이 쓰이고 있습니다.

              ⑽세존(世尊, bhagavā, bhagavat): 세존이란 글자 그대로 ‘세간에서 가장 존귀하신 분’이란 뜻입니다.

              붓다를 세존이라고 일컫는 것은 ‘존귀한 자(bhagavā, 世尊)’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보통 ‘주인(Lord)’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어떤 지배나 군림을 암시하는데, 이런 관념은 붓다 자신이 거부했던 것들입니다. 이와는 달리 이 말을 ‘축복받은 자’라고 옮기는 것도 다른 누군가에 의해 축복을 받게 된다는 의미를 가지게 되기 때문에 올바른 번역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초기불교적 시각에서 보면 세존을 ‘존귀한 자’로 번역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존을 ‘존귀한 자’로 번역하면 군림과 타자에의 의존이라는 두 개의 극단적인 의미 함축을 배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남방 상좌부 불교도들은 앞에서 열거한 열한 가지 명칭 중에서 붓다 자신을 일컫는 ‘여래(如來)’와 ‘깨달은 자’라는 의미의 보통명사인 ‘불(佛)’을 제외한 ①응공, ②정변지, ③명행족, ④선서, ⑤세간해, ⑥무상사, ⑦조어장부, ⑧천인사, ⑨세존을 가리켜 붓다의 아홉 가지 특성[九德]이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삼보에 귀의할 때마다 이것을 늘 암송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유의할 점은 붓다께 구원을 청하는 것은 불교도의 올바른 신행이 아닙니다. 붓다란 이상적인 인간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그에게서 어떤 식의 보호(patitthā, 依止)를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됩니다. 우리가 귀의를 한다는 것과 보호나 원조를 구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두 개의 행위하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붓다는 구세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