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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과 동행을/💕법문의도량

🙏마음이 무엇인가?

by 이初心 2026. 4. 8.

    🙏마음이 무엇인가?

    바른 철학(哲學)이란 무엇인가?
    앞서 언급한 본래시불 자리, 당래(當來)부처가 되는 당래성불(當來成佛)이 아니라, 본래 바로 부처가 되어 있다는 자리, 그 자리를 분명히 느껴버려야 이른바 돈오돈수(頓悟頓修)가 됩니다.

    그 자리를 느끼지 못하면 돈오(頓悟)도 못되고 돈수(頓修)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특히 삼 년 동안이나 공부하시는 스님들은 그때그때 선지식(善知識)들 한데서 법문을 많이 들으시겠지만 그래도 자기 공부하는 길에 관해서 확연히 견해와 신(信)이 차 있어야 합니다.
    <신해(信解)>

    그래서 선행적으로 본래시불 자리를 느낀 다음에는 무엇이 필요할 것인가?
    그다음에는 우리 범부 중생이 본래 부처라 하더라도 자기 숙세 누겁(累劫)의 숙업(宿業) 때문에 습기(習氣)가 우리한테 끼어 있으니까 습기를 녹여서 성불(成佛)까지 가는 길목 수도의 위차<修道의 位次>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길목을 잘 모르면 공부하는 경계가 많기 때문에 더러는 자기 몸뚱아리가 텅텅 비어 오기도 하고, 더러는 공중으로 떠올라가는 듯한 경쾌한 마음도 느끼는 것이고, 가지가지 경계가 많이 있습니다.

    부처님 같은 모양이 나오기도 하고, 또는 빛이 훤히 이렇게 밝아서 나오기도 하고 방안도 훤하고, 벽을 뚫고서 저편도 보인단 말입니다.

    그런 때가 있는 것인데 그런 때를 당할 때 기분이 나쁠 때는 모르거니와 쾌적하고 그렇게 상쾌하고 자기 몸에 부담을 느끼지 않고, 그런 때는 아! 견성오도(見性悟道)가 이런 자리가 아닌가? 이렇게 혼동(混同)을 느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공부하는 경계에 대해서 분명히 알아야 이른바 암중모색(暗中摸索)이 안 되고 동시에 증상만(增上慢)이라, 못 통하고 통했다 하고, 또 못 증(證)하고 증했다 하는 그런 증상만을 안 내는 것입니다.

    증상만을 한번 내버리면 공부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수도(修道)의 과정, 수도의 위차가 그것이 비록 한번 깨달으면 다 된다.

    이렇게 하더라도 깨닫기 자체도, 앞서 말씀과 같이 깨닫는 과정에 경계가 많아서 참다운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점검하기가 쉬운 것도 아니고, 설사 초견성(初見性)을 했다 하더라도 성불까지 가는 길은 또 요원한 길입니다.

    그러기에 본래시불 자리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분명히 돈오(頓悟)이지만 우리가 부처까지 간다고 생각할 때는 습기를 녹이는 과정을 생각할 때는 또 역시 점수(漸修)란 말도 옳단 말입니다.

    따라서 따지고 보면 돈오돈수(頓悟頓修)나 돈오점수(頓悟漸修)가 거리가 먼 것이 아닙니다.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라, 모든 중생들이 부처와 더불어서 본래로 성불 되어 있다.
    이런 자리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분명히 돈오인데 그렇다고 그 자리를 분명히 좀 느끼고 안다고 해서 그것이 끝난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른바 해오(解悟)라, 풀 해(解)자, 깨달을 오(悟)자, 해오로 해서는 이치로는 안다 하더라도, 자기가 정작 자기 자성(自性)을 증명 못한 경우에는 불공덕(佛功德)은 안 나오는 것입니다.

    부처님 명호(名號) 가운데, 여래십호(如來十號) 가운데 명행족(明行足)이란 것이 있습니다.

    밝을 명(明)자, 행할 행(行)자, 족할 족(足)자입니다.
    이것은 무엇인가 하면 ‘밝음’ 이것은 바로 지혜(智慧)를 말합니다.
    그런 지혜가 부분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완벽한 지혜를 다 갖추고 있다는 것 이것이 명행족입니다.

    따라서 참말로 깨달으면 그때는 그런 모든 지혜를 완벽하게 갖추어야 합니다.
    마음만 좀 개운하고 무엇에 막힘이 없고 그 정도가 참다운 깨달음이 아니라 명행족이 되어야 합니다.

    삼명육통(三明六通)을 다 갖추어야 합니다.
    우리가 성불하는 길이 본래의 자리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한 걸음도 옮기지 않고 본래 부처가 되어 있지만 습기를 녹여서 간다고 생각할 때는 요원(遙遠)한 길입니다.

    그러기에 십지명(十地名)에서 보살초지(菩薩初地), 이지(二地), 삼지(三地), 사지(四地), 그런 것이 있습니다.

    그런 도리를 잘 모른 사람들은 그것은 교가 아닌가?
    선법(禪法)에서는 그런 것이 필요 없지 않는가?
    선(禪)과 교(敎)가 원래 둘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앞서 허두에서 말씀드린 요심수도, 마음이 무엇인가, 마음이 본래 부처인 것을 깨닫고 닦으면 생공이이성(省功而易成)이라, 본래 공(功)을 많이 안 들이고도 성불(成佛)하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와 나와 나누어 생각하고, 마음 밖에서 도(道)를 구하고 진리(眞理)를 구하고 부처를 구한다고 생각하면 공부가 굉장히 더딘 것입니다.

    그러기에 불요심수도(不了心修道)면 증사(蒸砂)가 작반(作飯)이라. 다만 자기 마음이 무엇인가를 모르고서 암중모색(暗中摸索)으로 애쓰고 닦는 것은 모래를 삶아서 밥을 짓는 것과 마찬가지로 밥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응당 본래시불 자리를 분명히 느끼고, 느꼈다고 생각하면 그 자리를 여의지 않고 공부를 지속적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참선 공부나 일반 공부나 한 말로 하면, 육조단경(六祖壇經)의 맨 나중이 있습니다만 무슨 경(經)이나 부촉품(咐囑品)이 경의 결론(結論)인데, 부촉품에 보면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그대들이 만약 여래(如來)의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성취하고자 하면 마땅히 일상삼매(一相三昧)와 일행삼매(一行三昧)를 증(證)가할 지니라.

    4조(四祖) 도신(道信) 대사의 법문이나,
    또는 5조 홍인(弘忍) 대사의 법문이나,
    6조혜능(六祖慧能) 대사의 법문이나 그와 같이 일관되어 왔던 것입니다.

    일상일행(一相一行)이란 말입니다.

    -🙏淸華 大宗師 『마음의 고향』-

    출처: 글쓴이: 🙏참마음
    https://cafe.daum.net/pokyodang/7QrQ/362

마음이 무엇인가.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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