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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과 동행을/💕대각교단세불법륜

七十卷 廻向偈 (칠십권 회향게)

by 혜명(해인)스님 2021. 2. 8.

七十卷 廻向偈 (칠십권 회향게)

隨其所業萬境轉 (수기소업만경전)
衆生相音各不同 (중생상음각부동)
九類衆生悉能現 (구류중생실능현)
應觀業報衆生界 (응관업보중생계)
*그 지은 바 업에 따라 일만 경계가 굴러서
*중생의 모습과 음성이 제각기 다르게
*아홉 종류의 중생으로 모두 나타남을
*빈틈없이 중생계의 업보를 관하라.

【業】 범어 karman의 번역. 갈마(羯磨)라 음역(音譯)한다. 조작(造作)의 뜻. 행위(行爲)ㆍ소작(所作)ㆍ의지(意志)에 의한 신심(身心)의 활동. 의지(意志)에 의한 신심(身心)의 생활을 의미한다.

①일반적으로 업(業)을 신(身)·어(語)·의(意)의 삼업(三業)으로 나눈다. 유부(有部)의 해석에 따르면, 이러 이러한 것을 하려고 하는 뜻이 의업(意業)이고, 그 의지를 신체적 행동과 언어적 표현으로 나타낸 것이 신업(身業)과 어업(語業, 구업(口業)이라고도 한다)이라고 한다. 또 업(業)을 의지(意志)의 활동인 사업(思業)과 사업(思業)이 끝나고서 행하는 사이업(思已業)의 이업(二業)으로 나누는데 이 경우, 사업(思業)은 의업(意業)이고, 사이업(思已業)은 신(身)ㆍ어(語)ㆍ이업(二業)이다. 삼업(三業)으로서의 작용의 본체(本體, 업체(業體)ㆍ업성(業性))에 대해서, 유부(有部) 등에서는 의업(意業)은 사(思, 의지(意志))라고 한다. 불교 본래의 입장은 후자라고 생각된다.

②유부(有部)에서는 물질적(物質的)인 것을 본체(本體)로 하는 업(業, 색업(色業)) 곧 신업(身業)과 어업(語業)으로, 표(表, 작(作)ㆍ교(敎))와 무표(無表, 무작(無作)ㆍ무교(無敎))가 있다고 한다. 이것들은 또 표업(表業)·무표업(無表業)이라고도 한다. 표업(表業)은 밖으로 표현되어 타인에게 보일 수 있는 것이며 무표업(無表業)은 타인에게 보일 수 없는 것이다. 무표업(無表業)은 무표색(無表色)이라 이름 지어지는 일종의 색법(色法), 보통의 물질과 같이 조잡하지 않다)을 본체(本體)로 하고, 강한 선악(善惡)의 업(業)에 의해서 일어나는데, 그 업(業)은 신표업(身表業)과 어표업(語表業)과 및 정(定) 등이다.

이 무표업(無表業)에 3종이 있다. 수계(受戒)와 정(定, 어느 것이나 다 선(善))에 의해서 일어난 율의(律儀)와, 습관적이고 특히 강한 결단을 가지고 한 악업(惡業)에 의해서 일어난 바의 불율의(不律儀)와 그 이외의, 때에 따라서 선악의 업에 의해서 일어난 비율의비불율의(非律儀非不律儀, 처중(處中)의 무표(無表))의 3종이 그것이다. 율의무표(律儀無表)는 계(戒)를 버리고 정(定)에서 나오기까지 계속되고, 그밖에 무표(無表)는 특별한 장해(障害)가 없는 한 일생동안 계속한다. 이들 무표(無表) 중에서 선(善)한 무표(無表)에는 악(惡)을 방해하는 작용이 있고, 악(惡)한 무표(無表)에는 선(善)을 방해하는 작용이 있어서 각기 그 사람의 후천적(後天的) 성격을 형성한다고 한다. 또 신(身)ㆍ어(語)의 각 표업(表業) 및 무표업(無表業)에 의업(意業)을 더하여 오업(五業)이라고 한다.

③선악의 업을 지으면, 그것에 의해서 그에 상응한 고락의 갚음(과보(果報)·이숙(異熟)이 생긴다. 이것을 업인(業因)에 의해서 업과(業果)가 생긴다고 한다. 비선비악(非善非惡)의 무기업(無記業)은 과(果)를 끄는 힘이 없다. 이 업인(業因)과 업과(業果)의 관계를, 유부(有部)에서는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업(業) 그것은 삼세(三世)에 실재(實在)하는 것으로서, 업이 현재에 있을 때 이것이 인(因)이 되어서 어떠한 미래(未來)의 과(果)를 끌 것인가가 결정되고(이것을 취과(取果)라고 한다), 업이 지나가 버림으로부터 과(果)에 힘을 주어서 과(果)를 현재에 이끌어 낸다(이것을 여과(與果)라고 함).

또한 경량부(經量部)에서는, 업(業)은 순간에 없어져 버리는데, 그 업(業)은 과(果)를 생하는 종자를 식(識) 위에 심어 주어, 그 종자가 과(果)를 끌어 일으킨다고 한다. 이 종자의 사상(思想)은 유부(有部)의 무표업설(無表業說)과 같은 것이다.

④업(業)을 여러 가지로 분류하기도 한다. 총체(總體)로서의 일생의 과보(果報, 갚음)를 이끄는 업(業), 곧 인간계(人間界)라든가 축생계(畜生界) 등에 태어나게 하는 강한 힘이 있는 업(業)을 인업(引業, 견인업(牽引業)·총보업(總報業)·인인(引因))이라 하고, 인간계(人間界) 등에 태어난 자에 대해서 개개의 구별을 주어서 개체를 완성시키는 업을 만업(滿業, 원만업(圓滿業)ㆍ별보업(別報業))이라고 한다. 인업(引業)의 갚음을 총보(總報), 만업(滿業)의 갚음을 별보(別報)라고 하여, 이 이업(二業)을 총별이업(總別二業)이라고 한다. 더욱 유부(有部)에서는 하나의 인업(引業)에 의해서 일회(一回)의 생을 받아 다시 그 위에 많은 만업(滿業)에 의해서 이생이 완성된다고 설(說)하고, 다업(多業)이 일생을 이끌거나, 일업(一業)이 다생(多生)을 끌거나 하는 것은 없다고 한다. 또 업에는, 산하대지(山河大地, 기세문(器世問))와 같은, 많은 생물(生物)에 공통하는 과보(果報)를 끌어 일으키는 공업(共業)과, 개개의 생물의 신체와 같은, 개개의 생물에 고유한 과보(果報)를 인기(引起)하는 불공업(不共業)이 있다.

⑤선심(善心)에 의해서 일어나는 선업(善業, 안온업(安穩業))과, 악심(惡心)에 의해서 일어나는 불선업(不善業, 악업(惡業)·불안온업(不安穩業))과, 선악(善惡) 어떤 것도 아닌 무기심(無記心)에 의해서 일어나는 무기업(無記業)의 셋을 삼성업(三性業)이라고 한다. 악업(惡業)은 벌(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업(業)이기 때문에 벌업(罰業)ㆍ벌(罰)이라 하고, 신(身)·구(口)·의(意)의 삼벌업(三罰業) 또는 삼벌(三罰)이 있다.

『중아함경(中阿含經)』 권32에는, 신(身)·구(口)·의(意)의 삼업(三業)중에서 의업(意業)이 가장 중하다고 설(說)하여, 불교가 동기론(動機論)에 입각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에 대해서 자이나교(敎)에서는 신(身)·구(口)·의(意)의 삼벌(三罰)중 신벌(身罰)을 가장 중(重)하다고 하여, 결과론에 빠져 있다. 또 숙려(熟慮)한 뒤에 결단하여 일부러 한 고사업(故思業, 고작업(故作業))과 그렇지 않고 뜻밖에(무의식적(無意識的)) 잘못한 불고사업(不故思業)은 그것만으로는 갚음을 받지 않는다고 한다. 고사업(故思業) 중에 적극적으로 한 강하고 중대한 업(業)을 증장업(增長業)이라 하고, 소극적으로 한 약하고 가벼운 고사업(故思業)은 불증장업(不增長業)이라고 한다. 점점 강하게 되는 업(業)을 증상업(增上業) 혹은 증장업(增長業)이라 하고 그렇지 않은 것을 조작업(造作業)이라 한다. 욕계(欲界)의 악업(惡業)과 같이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 오식(五識)으로 받는 고(苦)만을 수(受)의 과보(果報)로 가져오는 업(業)을 신수업(身受業). 색계(色界)ㆍ무색계(無色界, 초선천(初善天)을 제함)의 선업(善業)과 같이 제육의식(六意識)으로 받는 락(樂)만을 수과보(受果報)로 가져오는 업(業)을 심수업(心受業)이라 하고, 합하여 이수업(二受業)이라 한다. 또 고수(苦受)와 락수(藥受)와 사수(捨受,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의 과모(果報)는 각기 욕과(欲界)의 악업(惡業)과 욕계(欲界)에서 색계(色界) 제삼선(三禪)까지의 선업(善業)과, 색계(色界) 제사선(四禪) 이상의 선업에 의해서 오기 때문에, 이 세 업(業)을 각기 순고수업(順苦受業)ㆍ순락수업(順樂受業)ㆍ순불고불락수업(順不苦不樂受業)이라 하고, 합하여 삼수업(三受業)이라고 한다.

또 욕계의 선업은 행복을 가져오기 때문에 복락(福樂), 욕계(欲界)의 악업은 불행을 가져오기 때문에 비복업(非福業), 색계(色界)ㆍ무색계(無色界)의 선업(善業)은 그 선정(禪定)의 힘에 의해서 갚음(보(報))이 정해져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부동업(不動業)이라 하고, 합하여 복(福) 등의 삼업(三業,또는 삼행(三行))이라고 한다.

또 악업은 혹업(黑業), 선업은 백업(白業)이라고도 하고, 여기에 이숙(異熟)의 좋아함직(백(白))한 것과, 좋아하지 않는 것(흑(黑))에 배당하면, 욕계(欲界)의 불선업(不善業)은 성질이 불선(不善)하여 이숙(異熟)도 좋아하지 않는 흑흑이숙업(黑黑異熟業), 색계(色界)ㆍ무색계(無色界)의 선업(善業)은 성질은 선(善)하고, 이숙(異熟)도 좋아하기 때문에 백백이숙업(白白異熱業), 욕계(欲界)의 선업(善業)은 성질도 이숙(異熟)도 흑백상잡(黑白相雜)하여 있기 때문에 흑백흑백이숙업(黑白黑白異熟業), 번뇌와의 관계가 단절(斷折)된 무루업(無漏業)은 상대적인 흑백(黑白)을 초월하여 이숙(異熟)을 초래(招來)하지 않기 때문에 비흑비백무이숙업(非黑非白無異熟業)이라 하고, 이것들을 합하여 사업(四業)이라 한다.

사업(四業)중에 앞의 세 번째 유루업(有漏業)으로, 이것들은 최후의 무루업(無漏業)에서 단감(斷減)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 내심(內心)을 남모르게 감추고 아첨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업(業)을 곡업(曲業)이라고 하고, 또한 성냄에 의해서 일어나는 업을 예업(穢業)이라 한다. 탐냄으로 의해서 일어나는 업을 탁업(濁業)이라고 하고, 이것들을 합하여 곡예탁(曲穢濁)의 삼업(三業)이라고 한다. 팔성도(八聖道)의 제 사지(四支)는 정업(正業)으로, 그 반대는 사업(邪業)이다.

⑥업에 의해서 그 갚음을 받는 시기에 다름(異) 있기 때문에, 순현업(順現業, 순현법수업(順現法受業))ㆍ순생업(順生業, 순차생수업(順次生受業))ㆍ순후업(順後業, 순후차수업(順後次受業))의 삼시업(三時業)을 나누어, 각각 이 세상에서 지은 업(業)에 응해서, 그 갚음을 이 세상에서 받는 것, 다음 태어난 세상에서 받는 것, 제 삼생(三生) 이후에 받는 것으로 구분한다.

이 삼시업(三時業)은 갚음을 받는 시기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정업(定業)이라 하고, 여기에 대해서 시기가 정해져 있지 않은 것을 부정업(不定業, 순부정수업(順不定受業))이라 하고, 거기에 삼시업(三時業)을 더하여 사업(四業)이라고 한다. 또 부정업(不定業)을 갚음의 내용(이숙(異熟))의 정(定)ㆍ부정(不定)에 의해서 시부정이숙정업(時不定異熟定業)과 시부정이숙부정업(時不定異熟不定業)의 둘로 나누고, 여기에 삼시업(三時業)을 더하여 오업(五業)으로 하며 또 삼시업(三時業)을 각기 시정이숙정(時定異熟定)과 시정이숙부정(時定異熟不定)으로 나누어 여섯으로 하고, 둘의 부정업(不定業)을 더하여 팔업(八業)이라고도 한다.

⑦업이 작용할 또는 의지할 곳이 되는 것, 혹은 유정(有情)을 고락(苦樂)의 과보(갚음)에 인도하는 통로(通路)가 되는 것을, 업도(業道, 근본업도(根本業道))라 하는데, 여기에 십선업도(十善業道)와 십악업도(十惡業道)가있다. 유부(有部)에서는 십선(十善)·십악(十惡)에는 업(業)인 것과 업(業)이 아닌 것(무빈(無貧)·무진(無瞋)·정견(正見), 빈(貧)·진(瞋)·사견(邪))이 있는데, 어느 것이나 의지(意志, 사(思))가 거기에 작용하는 바의 의지할 곳이 되기 때문에 업도(業道)라 한다고 했다.

『경량부(經量部)』나 대승(大乘)에서는, 십선(十善)·십악(十惡)은 모두 업(業)이어서 의지(意志, 사(思)) 를 체(體)로 하는데, 처음의 칠업도(七業道)에 있어서는 신(身)ㆍ구(口)를 발동(發動)하는 의지(意志, 사(思))가, 사유(思惟)하여 결정하는 의지(意志, 사(思))의 작용하는 바가 되기 때문에 업도(業道)라 하고, 또 그 발동(發動)의 생각에 의해서 생긴 생각의 종자도 업도(業道)라 한다. 뒤의 셋 곧 빈(貧)·진(瞋)·치(癡) 등은 순차(順次)로, 또 교호(交互)로 생기기 때문에, 앞의 것은 뒤의 것 때문에 업(業)의 도(道)가 되고, 또 유정(有情)을 지옥 등의 악취(惡趣) 등에 인도되는 도(道)가 되기 때문에 업도(業道)라고 설(說)함, 또 업(業)에는, 준비적 행위(行爲, 가행(加行))와 목적을 수행하는 그 순간의 행위(根本)와 완수(完遂)한 뒤의 종속적(從屬的)인 행위(후기(後起))가 있는데, 이 가운데 근본만을 업도(業道)라고 한다.

⑧번뇌도(煩惱道)ㆍ업도(業道)ㆍ고도(苦道).

⑨업(業)은 갚음(과보(果報), 이숙(異熟)을 내는 인(因)이 되기 때문에 업인(業因)ㆍ인업(因業)이라 하고, 업(業)에 의한 갚음을 업과(業果), 업보(業報)라 한다. 또 업인(業因)에는 업(業)을 일으키는 원인(번뇌 등)이라고 하는 의미도 있고, 인업(因業)에는 인(因)과 업(業), 주인(主因)과 조연(助緣))이라고 하는 의미도 있다.

【業報】 업보란, 행위[業, karma]의 결과(보報, vipāka)로서 받는 것을 가리키는 불교용어이다. 과보(果報)라고도 한다.

업보는 크게 총론과 각론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성실론』에 따르면 총론은 선한[善] 행위와 선하지 못한[不善] 행위는 과보를 낳지만 선악미정인[無記] 행위는 과보를 동반하지 않는다. 또 선한 행위는 좋아하는 과보[愛報]를 낳고 선하지 못한 행위는 싫어하는 과보[不愛報]를 낳는다는, 행위와 그 결과의 대응 법칙이다. 각론은 이것을 중생과 인간 사회에 구체적으로 적용한 것인데, 『구사론』에 따르면 인업(引業)이 윤회하는 중생 중 어떤 형태로 태어나는지 전반적인 과보[總報]를 낳고, 만업(滿業)이 그 중생의 외모·부귀·수명 등의 구체적 과보[別報]를 낳는다고 한다.

또 『구사론』의 사업(四業)은 총론을 보다 세분화하여 중생과 인간사회의 차이뿐만 아니라 붓다와 중생의 차이까지 포괄하여 그 상응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즉 첫째, 흑흑업(黑黑業)은 악한 과보를 낳는 악한 행위이며, 둘째, 백백업(白白業)은 선한 과보를 낳는 선한 행위이며, 셋째, 흑백업(黑白業)은 선악이 혼재된 과보를 낳는 선악이 혼재된 행위이며, 넷째, 불흑불백업(不黑不白業)은 선악을 벗어난 열반(涅槃)을 낳는 무루업(無漏業)을 의미한다.

【九類衆生】 과거 생에 지은 선악의 행위에 따라 금생에 몸을 받을 때 아홉 가지의 형태로 태어나게 되는 중생의 모습. 구류생(九類生) 또는 구류지생(九類地生)이라고도 하며, 《금강경》에 나오는 말이다.

① 태로 태어난 태생(胎生).
② 알로 태어난 난생(卵生).
③ 습한 곳에서 태어난 습생(濕生).
④ 변화하거나 스스로 업력에 의하여 갑자기 화성(化成)하는 화생(化生).
⑤ 빛이 있어 태어난 유색(有色).
⑥ 빛이 없이 태어난 무색(無色).
⑦ 생각이 있어 태어난 유상(有想).
⑧ 생각이 없이 태어난 무상(無想).
⑨ 생각이 있지도 없지도 않게 태어난 비유상비무상(非有想非無想)을 말한다.

이 세상의 모든 중생을 아홉 가지로 분류한 것. 구류중생 중 앞의 네 가지를 사중생(四衆生) 후반의 다섯 가지를 오생(五生)이라 한다. 태ㆍ란ㆍ습ㆍ화(胎卵濕化)의 사생은 색신 육신의 본능에 사로잡혀 사는 삶이다. 오생(五生)은 유색중생ㆍ무색중생ㆍ유상중생ㆍ무상중생ㆍ비유상비무상중생이며, 이 다섯 중생은 우리의 사유세계를 중심으로 분류한 중생. 곧 삶에 대한 철학과 신조와 신념체계를 바탕으로 분류한 것이다.

① 유색중생 세계: 현실에 집착한 삶, 현실 속에서 시시비비와 이해득실에 집착하는 세계이다. 현실 속에서 시시비비나 이해득실에는 신경을 곤두세우는데 실상 자기마음의 이치나 무상의 이치 등 이치의 세계가 존재하는 줄도 모르고 설사 안다 할지라도 거기에는 관심이 없이 현실 문제에만 관심을 가지는 것을 유색중생이라 한다. 유색중생의 세계가 만연해지면 현실이 항상 시비이해로 시끄러워지게 된다. 그리하여 내가 옳다 네가 옳다하여 극단적으로 나아가다 보면 갈등이 생겨나고, 갈등이 이어지다가 보면 결국 싸움이 되는 세계가 유색중생 세계이다.

② 무색중생 세계: 현실문제에 초연하고 그 이상적 마음에만 집착하는 세계이다. 현실 속에서는 그 누구를 공경한다거나 불공을 한다든지 등 현실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풀어가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나 몰라라 하는 것을 말한다. 현실 속에서 복을 짓거나 지혜를 닦으려고 하지 않고 즉심시불(卽心是佛)이라 이 마음이 곧 부처이니 마음 문제만 해결하면 현실문제는 모른 체 해도 된다고 한다. 이렇게 색이 없는 마음 세계만 붙들고 현실문제는 나 몰라라 하다보면 현실 세계가 어렵게 된다. 자기가 사는 현실이 어렵게 되고, 자기가 처한 사회 집단도 어렵게 되어 결국 현실적 발전은 기대 할수가 없게 된다.

③ 유상중생 세계: 항상 생각 궁글리는 것을 능사로 삼아 문자나 배우고 가르치는 것에만 집착하는 세계이다. 입으로는 부처님 행을 말하고 글로 쓰고 사고(思考)로는 많이 한다. 그래서 법문에 의지하여 수행을 통해서 그 자리에 합일해야 하고 법문대로 살아야 한다고 하면서, 예를 들어 원망생활을 감사생활로 돌리자, 그렇게 하려면 이렇게 저렇게 해야 한다고 분석하고 말은 무성하게 하지만 실질적으로 마음 가운데 원망생활을 감사생활로 돌리는 이것이 안 되는 세계이다. 다시 말해 유상중생 세계라는 것은 언어와 문자, 배우고 가르치는 것에만 집착해 있으면서 마음으로 행동으로는 옮기려 하지 않는 그런 중생세계를 유상중생 세계라 한다.

④ 무상중생 세계: 모든 생각은 쓸데없는 것이다. 모든 생각은 전부 다 번뇌 망상이고 배우고 가르치는 이것 또한 다 쓸데없다는 것에 집착하는 세계이다. 그래서 언어와 문자, 배우고 가르치는 모든 것을 떠나서 무념무상에만 집착하는 세계이다. 여래의 지혜덕상을 계발해서 그 지혜덕상으로 천만방편을 베푸는 부처님의 자비실행을 하려고 하지 않으면서 그저 무념무상의 완공(完空)에 집착해 있는 것이다.

⑤ 비유상비무상 세계: 유상무상이 다 옳은 것이 아니다 하여 비유상비무상으로, 유상에도 걸리지 않고 무상에도 걸리지 않으려는 생각에 집착되어 사는 세계이다. 물론 유상무상 이 양쪽에 걸리지 않으려고 해야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강하게 유상을 발동해야 할 때가 있고 무상을 발동해야 할 경우가 있는데 걸리지 않으려는 거기에 집착이 된 나머지 어정쩡한 입장에 빠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세계이다.

여기에서 차원을 높여 구류중생심을 다 무여열반 이멸도지(無餘涅槃而滅度之)해야 한다. 《금강경》 ‘대승정종분(大乘正宗分)’에 보면 일체중생계인 태생과 난생과 습생과 화생과 유색과 무색과 유상과 무상과 비유상비무상은 다 무여열반에 넣어서 전부 다 멸하여 제도하리라 했다. 이 무여열반이라 하는 것은 그 경지에 도달되기 전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세계이다. 자칫 잘못하면 그냥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것으로만 생각할 수도 있고, 또 그렇지 않으면 무엇인가 하는 의심에 걸리기도 하는데 무여열반은 마치 용광로와도 같은 것이다. 용광로라 하는 것은 사람들이 주워오는 온갖 잡철을 가져다 넣으면 그 모습은 모두 소멸이 되어버린다.

그러므로 무여열반의 자리에 우리의 구류중생심을 모두 다 넣게 되면 계교사량과 집착의 중생심이 모두 소멸되어버린다. 소멸된 그 자리에는 오직 보리심만 남게 되는데 마치 용광로에서 순수한 쇠만 남는 것같이 이것을 멸하여 제도했다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보리심이 생산되면 그 보리는 생사대해를 건너갈 수도 있고, 일체 중생에 유익을 줄 수도 있고, 자기 자신의 영생 문제도 해결되고, 영광된 앞길이 보장되는 것이다.

비유상비무상 자리는 백척간두이다. 이 자리는 저 아래 태란습화 자리로부터 올라오고 또 올라와서 비유상비무상의 꼭대기까지 온 것이다. 이 백척간두에서 진일보해야 한다. 일보를 전진하면 그 자리가 무등등한 자리요 만법으로 더불어 짝할 수 없는 자리요, 천상천하에 독존의 자리이니 이 자리에 도달되어야 무상성위(無上聖位)에 오른 것이라는 의미이다.

世尊應化 三千四十七年
陰 十二月 二十四日
於頭陀山 牧牛閑室
世界佛敎 初代敎皇 釋迦山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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七十卷 發願文 (칠십권 발원문)

至心懺悔三世業 (지심참회삼세업)
更不平生諸惡業 (갱불평생제악업)

*마음을 다하여 삼생의 죄업을 참회 하옵나니
*살아있는 동안 다시는 모든 악업 짓지 않기를 발원합니다.

世尊應化 三千四十七年
陰 十二月 二十四日
於頭陀山 牧牛閑室
世界佛敎 初代敎皇 釋迦山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