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바라밀행(六婆羅蜜行)
布施(보시)
持戒(지계)
忍辱(인욕)
精進(정진)
禪定(선정)
智慧(지혜)
육바라밀행은 대승불교로 가는 실천적 지침이다.
소승불교의 실천 지침이 무상관, 부정관, 무아관이라면 대승불교에서는 육바라밀이다. 육바라밀이란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智慧)의 여섯 가지 진리이다.
이 여섯 가지 덕을 잘 실천하면 인간은 누구나 마음의 고통을 없애고 열반에 이를 수 있다. 옛사람들은 바라밀을 도피안(到彼岸)이라 번역했다. 피안에 이른다는 말이다. 이 고통의 세상을 언덕이라 한다면 극락의 저세상은 피안이다.
육바라밀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세세생생 열심히 수행해 깨달음을 얻어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맹세이다.
모든 사람은 부자가 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가만히 따져보자. 왜 부를 얻어 가지려 하는가?
단지 혼자의 기쁨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한 것인가.
이것이 중요하다.
나 혼자 혹은 내 가족만을 위해 재산을 모으려 할 때는 집착을 부르고 이 집착은 고통을 낳게 마련이다. 그렇게 살다가 죽을 때는 과연 무엇을 가지고 갈 것인가?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가는 것이 인생이다.
기독교 속담에는 '수의엔 주머니가 없다.'는 말도 있다. 죽을 때는 몸뚱이조차 가지고 가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왜 이런 것들에 집착하는가. 재산이 아무리 많아도 본성을 찾는 데는 아무 도움이 안 된다. 돈을 버는 것은 좋은 일이다. 중요한 것은 모은 돈과 재산을 어떻게 다른 중생을 돕는데 쓸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것이 '보시'이다.
그렇다고 보시란 것이 단순히 물질적인 대상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른 사람을 위해 쓰겠다고 하는 마음이면 된다.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남에게 조건 없이 베풀면 욕심이 없어진다. 눈, 귀, 코, 혀, 몸, 뜻을 통해 모든 사람들을 즐겁게 해줄 수 있으면 그것이 곧 보시이다.
'지계'란 윤리적 실천 운동으로서, 계율을 지킨다는 뜻이다. 부처님의 가르침 중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그런데 '계율'의 의미를 놓고 볼 때, 소승불교와 대승불교에서는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소승불교 수행에서는 보통 순수한 마음을 지키기 위해 계율을 따른다.
마음이 순수하면 언젠가 우리는 깨달음을 얻어 고통에서 벗어난다.
계율은 사악한 세상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보호해 주는 장벽과 같다.
마치 도둑이 보물은 훔쳐 가지 못하게 하는 경보 장치처럼 계율은 우리 마음 안에 있는 보물을 지켜주는 것이다. 그래서 '나쁜 짓을 하지 말라.' '착한 일을 하라.' 깨끗한 마음을 간직하라.'는 교훈적 종교의식을 강조한다.
그러나 대승불교 수행에서는 계율이 오직 나만을 위해 있는 것이냐, 아니면 다른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냐를 생각한다. 똑같은 계율이어도 지키는 방법이 약간 다르다. 대승불교 수행에서의 계율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며, 모든 중생을 위한 것, 즉 다른 사람을 돕는데 사용되어야 한다.
어떤 상황에서는 계율을 깨는 것이 계율을 지키는 것보다 오히려 다른 사람을 위한 길일 때가 있다. 마음만 맑고 순수하다면 계율을 지키는 것도 올바른 수행이며 계율을 깨는 것도 올바른 수행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단지 나를 위해서인가, 아니면 중생을 위해서인가 하는 점이다. 오직 내 마음의 순수함을 위해 계율을 지키는 것이라면 그것은 때때로 맑은 수행이 될 수 없다.
예를 들어 이런 상황을 생각해 보자.
어느 날 나무꾼이 나무를 하러 산에 올라갔다.
갑자기 언덕 위에서 토끼 한 마리가 겁에 질려 뛰어 내려온다.
잠시 후 사냥꾼이 뒤쫓아와 나무꾼에게 묻는다.
"토끼가 어디로 갔는지 아십니까?" 자, 부처님은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만약 이 계율에 충실하고자 나무꾼이 토끼가 뛰어간 방향을 사냥꾼에게 가르쳐준다면 사냥꾼은 뒤쫓아가 토끼를 죽일 것이다. 이렇게 되면 토끼와 사냥꾼 사이에 아주 나쁜 업이 만들어지게 된다. 비록 나무꾼은 정직한 일을 했을는지는 몰라도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 계율을 지킨 셈이 된다. 아주 좁은 의미의 계율 수행이다. 그러나 만일 나무꾼이 토끼가 달아난 방향의 반대 방향을 가르쳐준다면 비록 거짓말을 한 것이 될지라도 그는 중생을 위한 아주 넓은 수행을 한 것이다.
계율이란 바로 이처럼 다른 중생을 돕기 위해 존재한다.
어떤 상황에서는 계율을 깸으로써 토끼를 살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냥꾼과 토끼가 나쁜 업을 쌓지 않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어떻게 순간순간 계율로써 다른 사람을 도와줄 수 있는가.
이것은 아주 중요한 수행이다.
"부처님 말씀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마음을 갖지 않으면 부처님의 법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우리가 어떤 '마음'을 만들 경우, 계율을 세워 지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수행이 된다. 하지만 모든 생각을 완벽히 끊고 어떤 마음도 갖지 않으면 계율은 필요하지 않게 될 수 있다. 선과 악을 다른 사람을 돕는 데 자유롭게 사용하면 이미 보살행이다.
셋째 '인욕'은 잘 참고 용서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내게 끼친 원한을 참고, 해를 끼쳐오는 것을 참고, 고통을 잘 이겨 나가 마음에 동요 없이 살아가는 것이다.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밖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평등한 일이나 불평등한 일이나 잘 참고 이겨 편안한 마음을 가지면 세상살이에 어떤 핍박이 오더라도 고통이 없게 된다. 인욕은 성냄을 참는 일이요, 원한을 용서하는 것이다. 좋은 감정이든, 나쁜 감정이든, 고통스럽든, 그렇지 않든, 오직 다른 사람을 위해 노력하기만 하면 된다.
넷째 '정진'은 한마음으로 꾸준히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장애를 부수고 겁내는 마음 없이 나의 이 노력이 모든 중생을 이롭게 하겠다는 굳건한 생각을 가지고 꾸준히 나아가는 것이다. 오직 노력, 노력, 노력뿐이다. 정진은 이생에서뿐 아니라 수없이 많은 생애 동안 수행을 하고 깨달음을 얻어 다른 사람을 고통에서부터 구해내겠다는 서원이다. 이의 다른 이름이 대자대비의 길이다.
다섯째 '선정'이란 무엇인가.
선정은 고요히 생각하는 것이다. 자기와 세계의 깊고 깊은 곳을 붙들고 깊이깊이 생각하여 흔들림이 없게 하는 것이다. 선정이란 단지 선방에 앉아서 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순간순간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들여다보고 노력하는 마음을 말한다. 이런 종류의 방향과 결심을 가지고 수행한다면 움직이지 않는 마음을 가질 수 있고, 어떤 조건이나 상황에서도 마음은 우주와 같이 맑다. 이것은 거울처럼 맑아서, 붉은 것이 거울 앞에 오면 붉은 것을 비추고 흰 것이 오면 흰 것을 비춘다. 맑은 거울은 결코 아무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볼 때, 들을 때, 냄새 맡을 때, 맛볼 때, 만질 때, 생각할 때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진리이다. 하늘은 푸르다. 나무는 초록빛이다. 개는 '멍멍' 짖는다. 설탕은 달다. 여러분은 배가 고프면 무엇을 하는가? 누군가 배가 고프면 당신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사람들은 선정이 단순히 앉아 있으면서 방해받지 않는 상태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는 틀린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진정한 선정은 푹신한 방석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을 것을 강조하면서 아주 깊은 명상에 빠진다. 그러나 이런 수행은 우리의 일상과 연결시킬 수 없다. 어떤 특별한 조건 하에서만 이루어지는 참선 정진은 선정과 일상의 삶을 분리시킬 분이다. 진정한 선정은 앉아 있거나 서 있거나, 걷거나 누워 있거나, 차를 타거나, 설거지를 할 때도 순간순간 움직이지 않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이것이 바른 선정이다.
임진왜란 때 황해도 구월산 배엽사라는 절에 한 노스님이 살았다. 젊은 스님들은 모두 피난을 가 텅 빈 절에서 노스님 혼자 법당에 앉아 좌선하고 있었다. 어느 날, 일본 군대가 들이닥쳤다. 그들은 불상을 가져가려고 법당 안으로 들어갔다. 법당문을 부수고 들어서려는 찰나. 어둠 속에 앉아 있는 한 늙은 스님을 발견했다.
"아니, 이 늙은 중이 겁도 없이 도망치지도 않고 뭘 하고 앉아 있느냐?"
그들은 소리를 질러댔다.
"지금 나가지 않으면 바로 죽이겠다."
하지만 노스님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옆에서 소리를 질러대건 말건 노스님은 흡사 석상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왜놈들은 노스님의 몸을 흔들고 코를 쑤셔보고 눈을 만져보았다. 살아 있기는 살아 있는 것 같은데, 동요가 없자 마침내 머리 위에 총을 세우고 공포를 한 방 쏘았다. 그러나 스님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부대장이 스님의 얼굴에 대고 말했다.
"야, 이 늙은 중아, 죽는 게 두렵지 않으냐?“
그러자 갑자기 스님은 그 부대장의 얼굴에 대고 '할'하고 소리를 내질렀다. 어찌나 크게 소리를 질렀던지 앉아 있던 사람, 서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라 뒤로 자빠졌다. 법당 밖에서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일본인 장군은 온갖 위협과 모욕에도 일말의 두려움조차 보이지 않는 노스님의 태도에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노스님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
"도인을 몰라보고 희롱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런 다음 장군은 부하들을 모두 철수시키고 절을 떠났다.
그렇다. 노스님의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야말로 진정한 선정이다.
어떤 상황, 어떤 조건 하에서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그래야 지혜가 나타난다.
육바라밀의 여섯 번째인 '지혜'는 무지를 치료하는 약이다.
맑고 깨끗한 마음을 가지면 지혜가 저절로 나타난다.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은 지혜로 가는 길이다. 많은 불교 수행에서는 항상 우리 마음을 어떤 종류의 오염도 없는 자유로운 상태로 가져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대승불교와 선불교에서는 마음을 만들지 않을 때 마음이 없다고 가르친다. 우리 마음이 우주와 같이 맑으면 순수하다 혹은 순수하지 않다 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순수하고 맑은 마음을 경험하는 것과 이를 사용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갓난아기를 예로 들어보자.
아기의 마음은 아주 순수하며, 집착이나 욕심이 없다. 배고플 때 먹고, 피곤할 때 잔다. 순수하고 오염되지 않은 마음이다. 어떤 불교 전통에서는 이 점을 강조한다. 우리 마음에서 모든 부정을 걷어내고 본래 순수함으로 돌아와야 한다.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자. 본래의 순수함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해서 그것에 집착한다면 지혜는 자랄 수 없다. 갓난아기의 마음은 아주 순수해서 어떤 집착도 없고 욕심에 의해 오염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모두 갓난아이가 될 수는 없다. 단지 순수한 마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어떻게 이 순수한 마음을 다른 사람을 돕는 데 쓸 것인가 하는 것으로 나아가야 한다.
갓난아기의 마음은 비록 순수하지만, 만약 엄마가 아프다고 했을 때 엄마를 위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가. 마찬가지로 오직 나 혼자만 순수하겠다는 마음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중생을 돕는 일이라면 좋은 상황이든, 나쁜 상황이든 어디에든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지혜이다. 지혜란 선과, 악, 깨끗함과 더러움을 넘어선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맑게 사용되어야 한다.
이것을 통해 행동과 경험을 소화시켜 지혜로 만드는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는 볼 때, 들을 때, 냄새 맡을 때, 맛볼 때, 만질 때, 생각할 때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진리이다. 하늘은 푸르다. 나무는 초록빛이다. 개는 '왕왕'하고 짖는다. 설탕은 달다. 당신이 배가 고프면 무엇을 할 것인가? 밥을 먹어야 한다. 고통으로 허우적거리는 사람들이 당신에게 다가온다면 당신은 무엇을 하겠는가? 그것에 대한 답은 지식이 아닌 지혜에서 나온다.
(선의 나침반에서)
-숭산 스님-
출처: 항상일로님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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