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부처님은 무아(無我)을 말씀하시는데 어찌 윤회(輪迴)를 하는 지요?
“무아(無我)가 무엇을 말하는지 잘 이해했습니다.
‘나’라는 것이 없다는 것은 알겠어요.
그런데 왜 윤회를 한다고 하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법륜 스님】
“종교와 진리의 차이에서 생긴 고민입니다.
진리의 측면에서 말하면, 한국에서 현존하는 불교라는 종교는 인도의 전통사상인 브라흐마니즘 또는 힌두이즘의 믿음을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부처님이 말한 ‘무아’, ‘무상’, ‘연기’, ‘윤회’, ‘업’ 이런 용어만 사용할 뿐이지 그 믿음의 바탕은 인도의 전통사상에 두고 있습니다.
인도의 전통사상에서는 ‘범아일여설(梵我一如說)’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 내용은, 우주의 본질을 깊이 탐구하면 브라흐만이라는 ‘범(梵)’이 있고, 인간에게는 ‘아트만’이라고 하는 자아가 있는데, 브라흐만과 아트만은 둘이 아니고 사실은 하나라는 겁니다. 이 아트만이라는 것이 지옥에도 가고, 천당에도 가고, 소도 되고, 말도 되고, 개도된다고 한 것인데, 이 범아일여설을 부처님이 비판한 겁니다.
‘아트만(atman)이라고 하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브라흐만교에서 아트만은 만물에 내재하는 영묘한 힘, 영원불멸하는 우주의 근본원리, 인간 존재의 영원한 핵을 이르는 브라만 철학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개념이다.
부처님은 이렇게 브라만교의 세계관을 부정하면서 거기서 나온 카스트제도도 부정했습니다. 인간에게는 양반과 쌍놈이라는 종자가 따로 있다는 카스트제도에 대해 부처님은 그렇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인도 전통사회의 믿음, 사회제도, 철학에서 나온 ‘아트만’을 부정하는 데서 ‘언아트만’, 즉 ‘아나뜨’, ‘무아’가 나온 겁니다. 그리고 영원하다는 것을 부정한 ‘아니짜’, ‘무상’이 나온 겁니다. 항상(恒常)하다고 하니까 그걸 부정해서 ‘무상(無相)’이라고 했고, ‘아’가 있다고 하니까 그걸 부정해서 ‘무아’라고 말한 거예요. 당시 종교와 철학에서 아트만이 있다고 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으니까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 겁니다.
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말하니까 그걸 부정해서 지구가 돈다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관찰자가 자전하는 지구 위에 있다 보니까 그런 착각이 생긴 겁니다. 그런데 그 용어를 부정하다 보면 ‘아, 태양이 가만히 있고 지구가 도는구나.’ 이렇게 이해하게 되는데, 그렇다고 해서 ‘태양이 가만히 있다.’라고 받아들이면 다음 차원에서는 또 안 맞는 말이 돼요. 태양도 또 은하계를 중심으로 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은 잘못 알고 있는 것을 부정한 것이지 그것이 어떤 특정한 상황을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무아(無我)’는 범아일여(梵我一如)설에서 주장하는 ‘아(我)’를 부정하기 위해서 나온 용어입니다.
윤회(輪迴)라는 말도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과 인도 전통사회에서 말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용어예요. 브라만교에서는 사람이 죽어서 다시 태어나거나 소 되고 말 되는 것을 ‘윤회’라고 표현했다면, 부처님은 우리의 마음이 괴로움과 즐거움을 되풀이한다는 것을 ‘윤회’라고 표현했습니다. 세상살이는 고락(苦樂)이 반복되는 것이다. 윤회에서 벗어났다는 말은 ‘다시는 괴로움이 없다.’라는 뜻입니다. 마음에 걸림이 없는 상태를 윤회라고 하는 것이다. 이걸 다른 말로는 ‘해탈(解脫)’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괴로움과 즐거움이 따로 있다고 생각해요.
괴로움은 없고 즐거움만 있는 곳을 ‘천상’이라고 말하고, 즐거움은 없고 괴로움만 있는 곳을 ‘지옥’이라고 말해요. 그래서 천상과 지옥을 돌고 도는 윤회를 한다고 말하는데, 부처님은 그런 뜻으로 윤회를 말하지 않았어요. 마음이 즐거운 것이 천상이고, 마음이 괴로운 것이 지옥인데, 즐거움도 영원하지 않고, 괴로움도 영원하지 않고, 즐거움과 괴로움이 계속 돌고 돈다고 말씀하셨어요. 왜 이렇게 즐거움과 괴로움이 윤회하는 걸까요? 이 윤회의 뿌리는 바로 망상(妄想)이 일으킨 ‘욕망’입니다.
내 욕망이 이뤄지면 기분이 좋고, 내 욕망이 이뤄지지 않으면 기분이 나쁩니다. 기분 좋음을 행으로 삼고, 기분 나쁨을 불행으로 삼으니까 행과 불행이 계속 되풀이되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분리시켜서 괴로움은 없고 즐거움만 있기를 원하는데,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즐거움이 있으면 반드시 그 뒤에 괴로움이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누구를 만나서 행복하면 헤어질 때는 괴로움이 따르게 되어 있어요.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고, 헤어짐이 있으면 만남이 있고, 만남이 계속된다고 하더라도 만남의 기쁨이 지속될 수는 없어요. 아무리 좋은 사람을 만나더라도 그 좋음이 몇 십 년 계속될 수는 없습니다. 젊을 때 어떤 남자가 나를 끔찍이 사랑해주면 정말 행복한 것 같지만, 늙어서도 계속 나만 쳐다보고 있으면 감옥 입니다.
내가 관심을 가져주기를 원할 때 관심을 가져주는 것은 즐거움이지만, 관심을 가져주기를 원하지 않을 때 관심을 가져주면 괴로움이 됩니다. 괴로움과 즐거움이 이렇게 늘 바뀌는 것을 붓다는 ‘윤회’라고 말한 겁니다. 이 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지면 괴로움이 없어져요. 그러면 동시에 즐거움도 없어집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은 즐거움을 놓지 못해서 괴로움도 함께 가지고 다녀요. 그래서 윤회할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즐거움을 추구하기 때문에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겁니다.
괴로움을 없애려면 즐거움도 놓아 버려야 해요. 그게 ‘해탈’입니다.
이것은 실제로 수행을 하면 실현 가능하고, 증명할 수가 있어요.
도달은 못해도 경험해 볼 수 있고, 언젠가는 도달할 수 있는 목표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죽어서 소가 되고, 말이 되는 것은 증명할 수가 없어요.
이것은 믿음의 영역입니다.
그렇게 믿는 것은 종교의 한 부분은 될 수 있어요.
믿음은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주관의 문제입니다.
‘저 사람은 저렇게 믿는구나.’ 이렇게 인정하면 될 일이에요.
부처님의 가르침과 힌두교를 섞어서 이해하려니까 앞뒤가 안 맞는 말이 되는 겁니다. 불교는 불법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힌두교적 믿음과 사상을 갖고 불교를 공부하는 이런 흐름을 개선하기 위해 나온 것이 초기 대승불교의 문제의식입니다. ‘자아’라는 것이 따로 없고 다섯 가지 요소의 결합에 불과하다고 설명하기 위해 나온 것이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입니다. 그런데 자아 개념을 그대로 갖고 있는 사람은 이번에는 또 ‘그 다섯 가지 요소 각각은 독립적인 것’이라고 여전히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반야심경에서 ‘색에도 독립된 실체가 없고, 수상행식에도 독립된 실체가 없다.’라고 다시 설명을 한 겁니다.
‘본질의 차원에서 보면, 색(色)이라 할 것도 없고, 수(受)라고 할 것도 없고, 상(想)이라 할 것도 없고, 행(行)이라 할 것도 없고, 식(識)이라 할 것도 없다.’
이걸 한문으로 표현한 것이 ‘공중무색 무수상행식(空中無色 無受想行識)’입니다.
인도 사람들은 저한테 ‘윤회를 안 할 바에야 왜 좋은 일을 합니까?’라고 묻습니다. 윤회를 한다고 하니까 겁이 나서 좋은 일을 한다는 거예요. 이거야말로 얼마나 비주체적인 생각입니까. 이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지옥 간다는 협박과 천당 간다는 유혹에 의해서 성립하는 종교적 관점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행자는 협박에 굴하지 않고, 유혹에 현혹되지 않습니다. 지옥을 가든 천당을 가든 그런 것과 관계없이 남을 헤치는 것보다 남을 돕는 것이 지금 나한테 더 좋다는 것을 압니다. 물에 사람을 빠트리는 게 기분이 좋아요? 물에 떠내려 온 사람을 건져주는 것이 기분이 좋아요?”
“건져주는 것이요.”
“진리는 지금 바로 작용하는 겁니다. 죽이는 것보다 살리는 게 더 좋습니다. 남에게 구걸하는 것보다는 남을 돕는 것이 훨씬 더 자신에게 만족스러워요.”
“감사합니다.”
“나(我)라고 할 것이 없는데 왜 윤회하느냐는 질문은 충분히 할 만한 질문이에요. 그런데 그때의 윤회는 사람이 죽어서 소 되고 말 되고 할 때의 윤회를 생각해서 생긴 의문입니다. 그런 윤회는 증명할 수가 없어요. 붓다가 말한 윤회는 괴로움과 즐거움이 되풀이된다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