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금강경에 ‘무주상’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런데 제 견해로는 그 상(相)이라는 것이 현실 세계를 살아가는 데 있어서 하나의 기준이고 에너지이고 추진력이라 볼 수 있는데 상(相)을 가지지 말고 보시를 하라고 한다면, 과연 이 세상에 어떤 변화나 발전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그냥 가만히 있으라는 말인지 이해가 잘 안 갑니다.
【법륜 스님】
거사님은 가끔 등산 가십니까? (아주 좋아합니다.)
산을 좋아합니까? (예.)
바다는? (회 먹으러 자주 갑니다.)
바다 보면 좋아요? 안 좋아요? (좋습니다.)
산에 가서 야 멋있다. 저 바위 멋있다. 소나무 멋있다 하면 내가 기분이 좋아요? 산이 기분이 좋아요? (제가 기분이 좋습니다.)
내가 어떤 여자를, 사람을 아주 좋아해요.
그럼 내가 좋아요? 그 여자가 좋아요? (내가 좋죠.)
그런데, 내가 아무리 좋아해도 그 여자는 나한테 눈길 한번 안 준다면 어떨까요? (밉죠.)
그럼 산에 가서 아무리 좋다고 해도 산이 눈길 한번 줬어요? 안 줬어요? (안 줬죠.)
그렇다고 산이 미워진 적이 있어요? 없어요?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길을 가다가 어떤 사람의 발에 걸려 넘어지면 화가 나요? 안 나요? (화나죠.)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면? (화를 낼 수가 없습니다.)
그때 화를 내면서 그 돌을 사정없이 차버리면 누구 발만 아파요? 내 발만 아프지.
배를 타고 가다가 옆에 배랑 부딪혀서 물에 빠졌다면 화나요? 안 나요? (화나죠.)
그런데 고개를 들어보니 그 배가 빈 배라면 어때요.? (화를 낼 수가 없겠죠.)
여기에 두 가지 성질이 있습니다.
우선, 내가 산을 좋아해도 내가 좋다.
내가 사람을 좋아해도 내가 좋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면 내가 좋다.
마음의 성질이 그렇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행복하려면 어떻게 해라?
좋아해라. 사랑해라.
두 번째는, 내가 한 여자를 좋아하는데 그 여자는 날 안 좋아하니까 밉죠?.
미워하면 괴로워요? 안 괴로워요? (괴롭습니다.)
그럼 왜 산에겐 미움이 안 일어나고 사람에겐 미움이 일어날까?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닐까요?)
반드시 사람이기 때문인 것만은 아닙니다.
갓난아기를 한 번 봅시다.
애기는 지가 알아서 하는 게 전혀 없이 부모가 다 해줘야 합니다.
남 잘 시간에 똥 누고 울고 오줌 싸고, 그릇을 엎어도 애한테 화냅니까? 안 냅니까? (안 내죠) 사람은 사람이지만 애기들 한텐 안 그러잖아요? (예.)
그런데 애가 너 댓 살쯤 되면 어쨌든 대소변도 가리고 혼자 알아서 하는 게 많아도 그래도 엄마가 애하고 싸웁니까? 안 싸웁니까? (맨날 싸웁니다.)
갓난애에겐 기대하는 게 없으니까 100% 다 해줍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게 아무것도 없어도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좀 자란 애는 한 10쯤 하는데도, 내가 한 20정도 기대하다 보니 불평이 생기는 겁니다. 내가 산 보고는 기대하는 마음이 없는데, 사람에 대해선 기대하는 마음이 있잖아요. ‘내가 너를 사랑하니까 너도 나를 사랑해라.’ 이렇게. 이 바라는 심리가 바로 미움의 원인입니다. 그가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미운 게 아니고, 내가 바라기 때문에 미워지는 겁니다.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바라는 마음만 없다면 그가 미워질까요? 아닐까요? (아니죠,) 이렇게 내가 바라는 마음만 없으면 괴로움은 안 생깁니다.
그러니까 행복하려면 베풀어야 하고 그것이 괴로움으로 안 돌아오게 하려면 바라지를 말아야 합니다. 베풀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으면 기쁨이 없고, 베풀면서 바라면 그 기쁨이 괴로움으로 바뀌게 됩니다. 베푸는 걸 보시(布施)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행복하려면 보시를 해라.’ 이러는 것이고, 베풀면서 바라는 마음이 있으면 그것이 때때로 괴로움으로 돌아오니까 그것마저도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바라는 마음 없이 베풀라.’고 하는 겁니다. 이와 같이 바라는 마음 없이 베푸는 걸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라고 합니다.
그런데 거사님이 걱정하는 건, 인간의 모든 행위의 동력이 늘 그 어떤 욕망인데 만약에 그 욕망을 다 놓아 버리면 행위 동력이 없어지지 않습니까, 하는 거 같습니다. 그런데 그 욕망을 한번 놓아 보세요. 놓아보면 행위 동력이 더 생기는지, 아니면 없어지는지…
내가 어떤 여자가 너무 좋아서 껴안고 뽀뽀를 했는데, 그 여자가 기겁을 하고 성추행이라 비난한다면 나는 괴롭히려고 그랬습니까? 아니죠, 나는 사랑해서 그랬을 뿐입니다.’ 난 널 사랑해서 그랬는데, 당신은 왜 그래?’라고 항변한다고 해서 그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아무리 사랑이라 하여도, 상대를 이해하지 않고 일방통행이 되면 상대에게 고통이 됩니다. 폭력이 됩니다. 폭행이 된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자식에 대한 여러분의 사랑이 자식에게는 굉장한 고통이 되고 감옥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애들이 집에서 뛰쳐나가려고 하는 겁니다.
감옥에서 탈출하려고. 이렇게 이해 없는 사랑은 폭력입니다.
가까운 사람 사이에 더 큰 고통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대를 이해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상대를 이해하면 누가 편안합니까? (본인이 편안하죠.)
이해 못하면 누가 답답해집니까? (본인이요.)
그래서 남을 위해서 이해하라는 게 아닙니다.
남을 위하는 마음을 내는 게 누구한테 좋다? 나한테 좋다. 이겁니다.
‘그 사람한테 바라지 마라.’ 그러는 게 그 사람 좋으라고 그러는 게 아닙니다.
바라는 마음을 버리면 누구한테 좋다? 나에게 좋다. 이 말 입니다.
그런 것이니까 한번 해 보세요.
거사님이 만약 집착을 모두 내려놓으면 정말 무기력해지는지, 아니면 오히려 더 생기가 도는지. 집착을 하면 큰 힘이 나오는 건 맞습니다. 그러나 그 힘은 파괴적인 폭력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집착을 내려놓아 버리면 ‘나’를 중심으로 세상을 보지 않습니다.
관여를 안 하는 게 그 사람한테 좋으면 관여 안 하고, 관여를 하는 게 그 사람한테 좋으면 관여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파괴력으로 작용하는 게 아니라 부드러우면서도 항상 이익되게만 작용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