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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과 동행을/💕법문의도량

각자의 불성을 꽃피우는 삶.

by 이初心 2023. 3. 28.



    각자의 불성을 꽃피우는 삶.

    과일에 씨앗이 들어 있듯이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하나의 씨앗을 지니고 세상에 나옵니다. 그것을 불성(佛性) 혹은 영성(靈性)이라고 합니다.
    그 씨앗을 움트게 하고 꽃 피우는 일이 삶의 의미이고 보람입니다.
    영성과 불성의 씨앗을 움트게 하고 꽃을 피우려면 먼저 우리들의 마음을 비우고 맑히는 일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마음을 맑히고 비울 수 있을까요.

    절에 열심히 나가는 사람 중에도 절에 안 나가는 사람보다 더 옹졸하고 꽉 막혀서 뭐 하나 배울 것이 없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는 진리를 관념적으로만 알기 때문입니다. 관념적인 것으로는 마음을 맑게 할 수 없습니다.

    물론 참선이나 염불, 기도를 지극히 해서 마음을 맑게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자칫 잘못하면 관념으로 빠지기가 쉽습니다. 진정으로 마음을 맑게 하기 위해서는 현실적으로 선행을 해야 합니다. 남에게 해 끼치지 않고 두루 착한 일을 행할 때 저절로 우리들 마음이 열리고 맑아지는 것입니다.

    또, 한 사람의 마음이 맑아지면 그의 둘레도 점점 맑은 기운이 번져갑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온 세상이 다 맑아질 수 있습니다. 가령 부처님과 예수님, 공자님 같은 성인들을 생각해봅시다. 그분들의 맑은 마음은 메아리가 되고, 두루 비추는 빛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만일 그분들이 인류 역사상 안 계셨다면 현재의 우리는 전혀 다른 삶의 모습을 하고 있을 겁니다. 너의 마음 따로 있고 내 마음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마음은 하나입니다. 한 뿌리에서 파생된 가지가 당신의 마음이고, 나의 마음이고, 그의 마음입니다.

    그럼 선행이란 무엇일까요?
    선행이란 착한 일이며 그것은 나누는 일입니다.
    나눈다는 것은 많이 가진 것을 그저 퍼주는 게 아닙니다.
    나눔이란 가진 사람이 이미 받은 것에 대해 마땅히 지불해야 할 보상의 행위이고, 감사의 표현입니다. 본래 내 것이란 없습니다. 지금 내가 가진 것은 이 우주의, 법계의 선물을 잠시 내가 맡아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육바라밀 가운데 첫째가 보시 바라밀입니다.
    보시란 나누는 것입니다.
    또 바라밀이란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는 일, 세상을 사는 일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보시 바라밀이란 세상을 사는데 제일가는 덕이 보시, 곧 나누는 일이란 뜻입니다.

    기쁨은 나누면 곱으로 커집니다.
    반대로 괴로움과 슬픔은 나누면 몇 분의 일로 줄어들지요.
    나누는 일에는 이처럼 미묘한 율동이 따릅니다.
    관계는 일방적인 것이 아닙니다.
    서로 주고, 받는 가운데 관계가 이루어집니다.
    그 관계는 우리 자신을 만들어갑니다.
    좋은 관계는 우리를 좋게 만들고, 언짢은 관계는 우리를 언짢게 합니다.
    맑고 향기롭게 살려면 될 수 있는 한 작은 것, 적은 것으로써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큰 것과 많은 것에는 살뜰한 정이 가질 않습니다.

    선물의 경우 너무 크게 많으면 받는 사람은 부담스럽습니다.
    작은 것, 적은 것이 귀하고, 소중하고, 아름답고, 고마운 것을 알게 되면 맑은 기쁨이 샘솟습니다. 그것이 바로 행복입니다.

    행복은, 맑은 기쁨은 외부에서 오는 게 아닙니다.
    저절로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것입니다.
    하나가 필요할 때 둘을 가지려고 하지 마십시오.
    둘을 갖게 되면 그 하나마저 잃어버립니다.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게 아닙니다.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 것입니다.
    꼭 필요불가결한 것만 가지려는 사람이 바로 무소유 자입니다.
    소유물은 우리가 그것을 소유하는 이상으로 우리 자신을 소유해버립니다.

    집이나, 자동차, 가전제품, 심지어는 지식까지도 거기에 집착해서 행복을 얻으려 해선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자칫 인간 존재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필요에 따라 살아야지 욕망에 따라 살아선 안 됩니다.

    필요란 생활의 아주 기본적인 욕구지만 욕망은 없어도 좋을, 분수 바깥의 욕구입니다.
    부처님께서 마지막으로 설하신 유교경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모든 고뇌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만족할 줄 알아라. 만족할 줄 안다면 항상 넉넉하고 즐거우며 평온하다. 그런 사람은 비록 맨땅 위에 누워있을지라도 편안하고 즐겁다. 그러나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은 설사 그가 천당에 있을지라도 그 뜻에 흡족하지 않을 것이다."

    만족할 줄 모른다는 것은 늘 갈증 상태에 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만족할 줄 알면 비록 가진 것은 없더라도 부자나 다름없습니다.
    행복의 척도는 필요한 것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느냐가 아닙니다.
    불필요한 것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워져 있느냐에 달렸습니다.
    저 자신이 몹시 부끄럽고 가난하게 느껴지는 경우는 나보다 더 많이 가진 사람 앞에 섰을 때가 아닙니다. 나보다 훨씬 적게 가졌지만, 그 단순함과 간소함 속에서 삶의 기쁨과 순수성을 잃지 않는 사람 앞에 섰을 때입니다.

    과잉 소비와 포식 사회가 인간을 병들게 합니다.
    소비자란 말을 생각해봅시다.
    소비자, 쓰레기를 만들어내는 존재란 말입니다.
    영혼을 가진 인간이, 무한한 창조를 이루며 살아가야 할 인간이 어떻게 쓰레기나 만들어내는 존재, 소비자가 될 수 있습니까.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려면 자연의 질서를 삶의 원리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자연의 일부입니다.
    자연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아낌없이 무상으로 베풀어 왔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전혀 고마운 줄을 모릅니다. 감사는 고사하고 함부로 더럽히고, 허물고, 끊임없이 학대하고 있습니다. 들짐승조차도 자기 둥지는 더럽히지 않는데 인간이, 소위 문명했다는 인간만이 자기의 생활환경인 자연을 더럽히고 있습니다. 만신창이가 되어 앓고 있는 자연은 곧 우리가 병을 앓는 것이요,

    자연의 신음 소리는 우리 자신의 신음 소리라는 걸 깨달아야 합니다.
    병이 든 자연, 허물어져 버린 자연에는 우리 인간들이 의지할 수 없습니다.
    자연이 죽어가듯 인간의 생명도 위협받기 때문입니다.
    과잉 소비로 자연환경의 파괴를 부추길 게 아니라 이제는 적은 것, 작은 것의 귀함, 소중함을 알아서 더 이상 자연이 병들지 않게 해야 합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자기 나름의 질서가 필요합니다.

    나눔으로써 맑은 기쁨을 얻으려 하고, 만족할 줄 알며, 소유는 꼭 필요한 것으로 스스로 제한하려는 그 마음들이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지름길입니다. 이런 태도는 결코 소극적인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한 지혜의 선택입니다.

    깨달음에 이르는 길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 자신을 속속들이 지켜보면서 삶을 거듭거듭 개선하고 심화시켜가는 명상이고, 또 하나는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입니다.

    전자는 지혜의 길이요,
    후자는 자비의 길입니다.
    이 두 길을 통해 우리는 본래부터 지녔던 불성과 영성의 씨앗을 틔워낼 수 있습니다.
    본래 청정한 우리 마음을 선행과 나눔으로 맑혀서 우리가 몸담아 사는 이 세상을, 그리고 많은 은혜 속에서 의지해 살다가 언젠가는 그 품으로 돌아가 영원히 안길 자연을 맑고 향기롭게 하는 것이 우리의 불성을 활짝 꽃피게 합니다.

    - 법정 스님-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
    -향상일로님의 글에서-

각자의 불성을 꽃피우는 삶.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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