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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과 동행을/💕법문의도량

무유정법(無有正法)

by 이初心 2023. 10. 5.

    무유정법(無有正法)

    서울 가는 길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말은 길이 없다는 것이냐, 아무렇게나 가도 된다는 것이냐? 둘 다 아니다. 서울 가는 길은 정해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 사람의 위치가 정해지면 서울 가는 방향은 정해진다.
    위치. 그 사람의 조건이 어떠하냐. 그게 인연이다. 인연에 따라 이루어진다.
    그 사람이 인천이라는 인연이면 동쪽이고, 춘천이라면 인연이면 서쪽이요,
    수원이라는 인연이면 북쪽이요.
    대구라면 어떨까? 북서쪽이요.
    이렇게 정해진다.
    그러나 인연, 조건을 논하지 않고 그냥 서울 가는 방향이 어디냐고 물으면 정해질 수 없다, 말할 수 없다. 이것을 무유정법이라고 한다.

    소승 불교는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불교에 무슨 소승이 있고 대승이 있겠어요. 그런데 동쪽으로 가라는 것을 정답으로 만들어 버린 사람을 두고 소승이라고 이름 붙였다. 문자에 집착했다. 이렇게 이름 붙였다. 부처님 말씀을 그대로 하기는 하는데, 자기는 움켜쥐고 있는데 그것을 춘천 사람에게 적용하면 안 맞다. 이것을 법집이라고 한다. 진리라는 것에 집착해서 이미 진리 아닌데 이르렀다. 그것을 타파해야 한다. 무 고집멸도 하면, 부처님이 말씀하신 게 고집멸도인데, 고집멸도를 동쪽으로 정하듯이 정답 정하듯 형상화했으므로 '이미 어긋났다'고 해서 부정한다고 '무'를 붙였다.

    무유정법의 원리가 뭐냐.
    무아(無我)와 무상(無常)이다.
    그러니까 무아와 무상이 여러 방식으로 표현된 것이 오온이요, 십이처요, 십팔계요, 십이연기요, 팔정도요, 이런 거예요. 그러니까 언어에 집착을 하게 되면 무아와 무상의 원리에 어긋난다. 그래서 그것을 부정하는 거예요. 무아와 무상의 원래 정신에 입각해 있어야 한다,

    언어에 집착하지 말고. 그런 관점에서 나머지를 부정하는 거예요.
    그러니 무상과 무아는 원래의 의미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무'를 붙이지 않는다. 무상과 무아를 상황마다 설명한 것이 오온, 십이처, 십팔계, 십이연기, 팔정도다. 그러니 앞에 '무'를 붙였다. 소승 교리가 틀렸다는 게 아니라, 소승교리라는 교리는 따로 없다. 그렇게 말에 집착하면 이름 하여 법집이라고 하고, 법집을 가지면 소승이라고 부른다.

    대승이라는 사람은 그런 것을 안 해야 하는데 대승도 집착을 하면, 공이라는 언어에 집착하면 이미 공이 아니다. 공이라는 상을 지었다. 그래서 선에서는 그것을 부정한다. 불립문자. 문자를 절대화 하면 안 된다. 그러나 종교를 보면 말씀이라고 해서 절대화한다. 불교는 문자를 절대화하면 안 된다. 사람이 옷을 입어야 합니까, 벗어야 합니까. 여러분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한다. 그러나 벗어야 한다, 입어야 한다, 정할 수 없다. 그러면 지 맘대로 할 거냐? 아니다.

    목욕탕에 들어갈 때는 벗고, 밖에 나올 때는 입어야 한다.
    밖에 나올 때는 무조건 입어야 하나? 아니다. 부부가 침대에 들어갈 때는 벗어야 한다. 넥타이 딱 매고, 벨트 졸라매고 들어가면 안 되잖아. 인연을 따라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처럼 아무렇게나 된다가 전혀 아니다. 인연이 정해지면 어디다! 하고 정확하게 나온다. 그러나 그것을 절대화해서는 안 된다. 이런 관점에서 법집, 진리라는 집착해서, 진리에서 어긋난 것을 깨트리기 위해서 무유정법이란 말을 쓴 것이다.

    - 법륜 스님-

    출처: 법륜 스님 <즉문즉설>
    출처: https://cafe.daum.net/seojinam/XgAz/303


무유정법-법륜 스님.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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