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공양-수까라 맛다바-
붓다께서 베살리(Vesālī, 毘舍離)에 머물고 계실 때, 근처에 있던 모든 비구들을 모아 놓고 석 달 후에 입멸할 것이라고 예고했습니다. 붓다는 베살리의 거리에서 탁발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베살리를 바라보고 아난다에게 “이것이 베살리를 보는 마지막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광경을 경전에서는 붓다께서 ‘코끼리처럼’ 뒤돌아보았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코끼리처럼’이란 커다란 코끼리가 뒤를 돌아볼 때 몸 전체를 천천히 돌리는 모양을 말합니다. 이것은 나이가 많고 또 병색이 짙은 붓다의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한역 경전에는 “대상왕(大象王)처럼 온몸을 오른쪽으로 돌려서 광암성을 바라다보았다”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현장(玄奘) 스님도 이를 기념하여 세워진 스투파(Sthūpa, 塔)의 옆에 서서 지난날을 회상했다고 합니다. 먼저 붓다께서는 많은 수의 비구들과 함께 베살리를 뒤로 하고 반다가마(Bhandagāma, 반다 마을)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반다 마을에 도착하여 그 마을에 머물면서 비구들에게 네 가지 가르침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네 가지 가르침이란 성스러운 계율[聖戒], 성스러운 정신통일[聖定], 성스러운 지혜[聖慧], 성스러운 해탈[聖慧]를 말합니다. 즉 붓다는 제자들에게 이러한 네 가지 가르침을 깨닫지 못하고 통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랜 동안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유전하고, 끝없이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닌다고 말씀했습니다. 붓다는 또한 반대로 이러한 네 가지 진리를 깨달아 그것에 통달한 사람은, 생존에 대한 갈애를 단절하고 생존의 원인을 멸진함으로써 다시 태어남을 받지 않는다고 가르쳤습니다. 반다 마을에서 마음껏 머무신 다음, 붓다께서는 핫티가마(Hatthigāma, 象村, 코끼리 마을), 암바가마(Ambagāma, 菴婆羅村, 망고 마을), 잠부가마(Jambugāma, 閻浮村, 장미사과나무 마을)를 거쳐 보가나가라(Bhoganagara, 善伽城)에 도착하였습니다. [대반열반경]의 여러 이본(異本)들에서는 모두 빠딸리가마(Pātaligāma)에서 꾸시나라(Kusinārā, 拘尸那羅)에 이르는 사이에 붓다께서 통과한 마을이나 도시, 강의 명칭들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수효와 순서에 대해서는 상당히 많은 차이점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팔리어로 씌어진 [대반열반경]에는 베살리를 지나서 벨바, 반다 두 마을을 거쳐 핫티, 암바, 잠부 마을을 통과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산스끄리뜨어 단편에서는 바이살리 다음에 도르나 마을 등 네 마을을 들고 있으며, 또 이어서 찾아간 마을들의 순서도 거꾸로 되어 있습니다. 2) 사대교법(四大敎法, Mahāpadesa) 팔리어 [대반열반경]에 의하면, 붓다께서는 많은 수의 비구들과 함께 보가나가라에 도착하여, 그 마을에 있는 아난다 쩨띠야(Ānanda cetiya, 靈廟)에 머물렀습니다. 이곳에서 붓다는 비구들에게 사대교법(四大敎法)에 대하여 설했습니다. 사대교법(Mahāpadesa)이란 ①이것은 붓다로부터 친히 들었다. ②이것은 규정에 맞는 교단에서 들었다. ③이것은 많은 장로들로부터 들었다. ④이것은 한 사람의 유능한 장로로부터 들었다는 것입니다. 이 가르침은 붓다 입멸 이후 발생할 수 있는 불설(佛說, Buddhavacana)에 관한 분쟁을 예견하고 설한 것입니다. 즉 분쟁이 발생할 경우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를 처방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다른 해석도 가능합니다. 붓다 입멸 후 일어난 분쟁을 계기로 사대교법의 가르침을 만들고 붓다의 유훈으로 가탁하였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어느 경우이든 붓다 입멸 후 불설에 관한 논쟁이 있었음은 틀림없을 것입니다. [대반열반경]에 따르면 붓다께서 제자들에게 3개월 후 입멸할 것임을 알리고 나서 사대교법을 설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사대교법은 불교 경전이 어떻게 불설로서 성립하게 되었는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사대교법은 불설과 비불설을 구분하는 아주 중요한 잣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네 가지 경우, 그 자리에서 바로 찬성하거나 반대하지 않고 낱낱의 말을 잘 생각한 끝에 성전(聖典)의 문구와 비추어본 다음 태도를 결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견해가 불설이라고 주장될 때, 네 가지 종류의 근거가 제시된다는 것입니다. 즉 붓다, 승가, 일군의 장로, 한 사람의 장로의 이름을 들어 불설이라고 주장하게 되면, 그 진위 여부는 경(經)과 율(律)에 의거하여 판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느 누가 주장하는 내용이 경과 율에 합치하면 불설로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으면 비불설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안양규의 견해에 의하면, “이 사대교법은 비구승가에 의해 고안된 것으로 붓다의 사후 그를 대신하게 될 권위적인 표준 경전을 만들기 위한 장치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이 사대교법의 성립 배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붓다의 사후, 법과 율은 붓다를 대신하는 각각 자신의 권위를 확보하기 위한 준비가 마련되어야 했다. [대반열반경]에 보이는 사대교법(Mahāpadesa)은 바로 법과 율을 텍스트로 만드는 과정을 보여준다. 진실한 법과 율을 경전화함으로써 교단 내에 있을 수 있는 교리와 계율의 논쟁을 해결하기 위한 장치가 사대교법이다. 구전 전통에서 표준적인 텍스트를 만드는 작업은 비구들이 승원 생활을 하고 있던 시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승원이라는 조직은 비구들이 이러한 작업을 물리적으로 지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3) 쭌다의 공양 한편 붓다께서 보가나가라에서 마음껏 머무신 다음, 많은 수의 비구들과 함께 빠바(Pāvā))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빠바 마을에 도착하여 대장장이 쭌다(Cunda, 純多, 淳陀)의 망고 동산에 머물렀습니다. 대장장이 쭌다는 붓다와 비구들을 자기 집으로 초대하여 공양을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그 음식물 중에 ‘수까라-맛다바(Sūkara-maddava)’라는 음식도 있었습니다. 붓다께서는 준비한 음식 가운데 ‘수까라-맛다바’가 있는 것을 아시고, 대장장이 쭌다에게 “이 음식은 나에게만 주고, 비구들에게는 다른 음식을 올리도록 하라”고 주문했습니다. 그리고 남은 수까라-맛다바는 구덩이를 파 그곳에 모두 묻도록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이것을 먹더라도 완전하게 소화할 수 있는 사람은 악마와 범천, 신들과 인간들, 사문과 바라문을 포함하더라도 붓다 이외에는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붓다는 쭌다에게 법을 설하여 기쁘게 하고 떠났습니다. 그런데 쭌다가 공양한 음식을 먹고, 붓다는 중병에 걸려 붉은 피가 쏟아지고 죽을 정도의 격심한 고통이 생겼습니다. 그렇지만 붓다는 정념(正念), 정지(正智)로써 그 고통을 참고 견디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고통도 차츰 치유될 무렵, 붓다는 비구들과 함께 꾸시나라로 향했습니다. 일반적으로 붓다는 대장장이 쭌다가 올린 ‘수까라-맛다바’라는 음식물을 드시고, 질병에 걸려 입멸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음식이 붓다의 마지막 공양이었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붓다께서 이 음식물을 드시고 ‘붉은 피가 쏟아지고 죽음에 가까운 심한 통증이 일어났다’고 경전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경전의 내용에 의하면 붓다는 ‘수까라-맛다바’라는 음식 때문에 격렬한 설사를 겸한 병에 걸린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즉 붓다는 쭌다가 올린 음식 때문에 죽음에 이르는 질병에 걸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붓다께서 취한 마지막 음식물과 그의 죽음에 관해서는 모든 불자들의 주된 관심사였습니다. 그래서 이에 관한 논의의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습니다. 이를테면 붓다고사(Buddhaghosa, 佛音)와 담마빨라(Dhammapāla, 佛護)와 같은 대주석가들의 해석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학자들의 다양한 견해들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논문에서는 붓다가 취한 마지막 음식물, 즉 ‘수까라-맛다바’가 무엇인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안양규는 “많은 논문들이 이 음식물은 고기가 아니라 채소라고 밝히려 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육식보다 채식을 높이 평가하려는 의도가 반영된 것이라고 보여진다. 특히 극단적인 채식주의자나 육식을 금지하는 불교도에서 두드러지는 것 같다”고 지적하였습니다. 그러면 그때 붓다께서 드신 ‘수까라-맛다바’라는 음식이 무엇이었는가? 이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대반열반경]을 주석한 붓다고사는 ‘수까라-맛다바’를 ‘연한 어린 돼지고기’로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른 두 사람의 견해도 소개했는데, 첫 번째 견해는 마치 우유가 음료수의 총칭이듯이, 수까라-맛다바는 소에서 생산된 5종의 액체와 부드럽게 익힌 쌀을 섞어 만든 요리들의 총칭이라고 했습니다. 두 번째 견해는 수까라-맛다바가 일종의 불사약의 이름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주석가 담마빨라는 또 다른 두 가지 견해를 제시했습니다. 즉 첫째는 돼지고기 그 자체가 아니라 돼지들이 짓밟은(maddita) 죽순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돼지들이 밟고 다니는 장소에 생긴 버섯이라는 것입니다. 산스끄리뜨본에서는 ‘정결하고 훌륭한 먹을 것과 마실 것’이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또한 팔리어 [대반열반경]에 해당하는 한역본들에서는 각기 다르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대반열반경] 에서는 다미음식(多美飮食)이라 하고, [반니원경]에서는 농미(濃美)로, [유행경]은 전단수이(栴檀樹耳)로,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잡사]에서는 종종상묘향미음식(種種上妙香美飮食)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불반니원경]에서는 음식 이름을 생략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수까라-맛다바’가 무슨 음식이었는가에 대해서는 붓다 입멸 이후부터 지금까지 논의되고 있습니다. 주석서에서조차 여러 가지 해석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주석을 한 5세기경에는 이미 뜻을 제대로 알 수 없게 되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오늘날 프랑스 요리에 사용하는 알 버섯[松露]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어쨌든 ‘수까라-맛다바’는 매우 특별난 음식이었음에는 틀림없지만, 무슨 음식이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여러 견해들을 종합해 보면 ‘수까라-맛다바’는 돼지고기류이거나 버섯류 둘 중 어느 하나였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채식주의자들은 굳이 이 음식을 버섯이라고 이해하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수까라-맛다바’라는 음식으로 인해 붓다께서 입멸하게 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 성과에 의하면, 반대로 그렇지 않다는 입장을 여러 문헌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팔리어 [대반열반경]을 주석한 붓다고사는 쭌다가 올린 마지막 공양물은 결코 붓다의 치명적인 질병의 원인이 아니었다고 했습니다. 즉 붓다고사는 후자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수까라-맛다바’가 무엇이었는가 하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미야사까 유우소우(宮坂宥勝)의 견해에 의하면, 붓다의 사인(死因)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수까라-맛다바’라는 특별한 음식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붓다께서 죽음에 이르는 병을 일으킨 ‘수까라-맛다바’는 무엇이라고 해도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오히려 가공의 음식이라고 해도 좋다는 입장을 표명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극단적으로 말하면 여래가 소화불량을 일으키고 죽음에 이르게 한 음식이라면 야생돼지의 고기, 버섯 그 외 무엇이라도 상관이 없다. 중요한 것은 죽음에 이를 병에 걸리게 한 소화불량에 의해 드러나게 된 여래의 불완전성이 역설적으로 법신의 영원성을 멋지게 논증하여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수까라맛다바 전설의 비밀은 이와 같이 이해될 수 있다.”라고 미야사까 유우소우는 말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좀 더 깊이 있는 논의가 진행되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4) 뿟꾸사와의 만남 한편 꾸시나라로 가던 도중에 붓다께서는 길옆에 있는 어떤 나무 아래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붓다는 아난다 존자에게 물을 길어다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아난다는 지금 막 5백 대의 수레가 지나갔기 때문에 물이 흐려서 도저히 마실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붓다는 다시 아난다에게 요청했습니다. 그리하여 아난다는 붓다의 거듭된 요청을 거절할 수 없어서 시냇가로 갔습니다. 그런데 방금 5백 대의 수레가 지나갔으므로 물이 흐려져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물은 깨끗하게 맑아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난다는 이러한 현상은 붓다의 신통력 혹은 위신력 때문이라고 경탄하게 됩니다. 바로 그때 알라라 칼라마(Ālāra Kālāma)의 제자이며 말라족의 아들인 뿟꾸사(Pukkusa)가 꾸시나라에서 빠바로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붓다를 친견하고 선정(禪定)의 깊이에 대해 여쭈었습니다. 그때 붓다께서는 자신의 경험담을 일러 주었습니다. 이러한 모든 일화들은 부처님의 위대함을 나타내기 위한 것임은 말할 나위 없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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