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불법과 동행을/💕불교자료실

禪이란 무엇인가?

by 이初心 2022. 12. 24.

    禪이란 무엇인가?

    1. 선이란 무엇인가?
    선(禪)이란 인도 고대 말인 범어에서 따온 말로써, 우리말로는 ‘생각하여 닦는다(思惟修)’ 또는 ‘고요히 생각한다(靜慮)’는 뜻이다. 고요히 생각한다는 것을 ‘정(定)과 혜(慧)를 균등하게 갖는다(等持)’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선이 고요히 생각하여 닦는다는 뜻이므로 이런 공부는 불교인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하는 성질의 것이라 본다.

    그런데 불교의 선(禪)은 좀 깊은 뜻을 갖고 있다.
    ‘고요히 생각한다’고 하지만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고 닦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우리들의 마음을 분류하면 네 가지로 말할 수 있는데 육단심(肉團心)․연려심(緣慮心)․집기심(集起心)․견실심(堅實心)이다.
    육단심은 우리의 육체적 생각에서 우러나는 마음이고,
    연려심은 보고 듣는 데서 분별하여 내는 마음이고,
    집기심은 소위 제7식과 제8식이다.
    이것은 망상을 내는 깊은 속마음이다.
    견실심은 본성으로서 이것이 부처님 마음자리다.

    참선은 부처님 마음자리인 견실심을 보는 공부이다.
    그러므로 선은 만법의 근본이 되고 불교의 핵심이 된다.
    부처님의 교법도 필경 이 선의 경지를 깨우쳐 주려는 데 근본이 있는 것이니, 그래서 부처님의 8만4천 법문과 교리는 부처님 말씀이고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선이 추구하는 부처님 마음자리를 깨치면 생사가 없고 일체에 뛰어난 대해탈인이 되며 완전한 진리의 지혜와 덕상을 갖춘 큰 성인이라고 일컫게 되는 것이니, 그 까닭은 우주만유의 근원적 실상 자리를 주체적으로 파악하였기 때문이다.

    2. 선의 목적
    선(禪)은 근본 자성을 요달하여 마음의 생사, 즉 망념을 끊어 버리는 것이다. 우리들은 아무리 힘이 있고 건강하고 권세가 있더라도 죽음을 면치 못한다. 그것은 나고 머물고 변하고 없어지는 이런 번뇌 망상에 휘둘려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로병사도 생긴다.

    선의 실제적인 목적은 외형적인 생사 해탈이 아니라 마음속의 생멸을 없애는 것이 첫째의 목적이다. 그런데 마음의 생멸이란 없애려고 하면 더 일어난다. 오히려 일어나는 곳(근본)을 찾아서 ‘어디서 나왔느냐?’고 관하게 되면 필경 나(我)라는 놈이 없는 줄을 알게 된다. 그때 생멸상이 비로소 몽땅 빠지게 되는 것이다.

    3. 선의 방법
    부처님 당시에는 모두 근기가 뛰어나서 선의 방법론이 필요 없었다.
    그러나 수행하는 사람을 위해서 세 가지 관법(觀法)이 있다.
    세 가지 관법이란 정관(靜觀)․환관(幻觀)․적관(寂觀)이다.
    이것을 천태(天台)선사는 공(空)․가(假)․중(中)의 삼관(三觀)이라 하였다.

    정관(靜觀)이란 한 생각 일어나는 데서 고요히 관하기를 “이 한 생각이 어디서 일어났는가” 하는 것이다. 일어나는 자리가 없는 것을 보면 고요해지는 것이니 고요한 것이 극치에 이르면 마침내 밝아진다.

    환관(幻觀)이란 밖의 경계를 보는 공부인데 보고 듣는 그 모두를 헛것이라고 관하는 것이다. 우리는 꿈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꿈에 집착하지 않는다. 우주 만상이 환(幻)임을 보게 되면 집착에서 떠나게 되고 자성이 밝아온다. 거기서 온갖 착한 일을 행하는 것이다.

    적관(寂觀)이란 정관과 환관이 한 덩어리가 된 것이다.
    안으로 일어나는 것도 없고 밖으로 모든 물상(物象)이 다 빈 것이다. 여기서 적연부동한 경지를 얻게 되어 마침내 깨닫는다. 주관과 객관이 한 덩어리가 되어 닦는 방법인 것이다.

    부처님 당시로부터 천여 년이 지나자 사람들의 근기가 약해져서 여러 가지 분별심과 나쁜 지견을 일으키므로 깨달아 들어가는 법에도 많은 방법이 더해져 갔다.

    참선법이 가장 체계화 조직화된 것은 중국 송나라 때 대혜(大慧)스님에 이르러서이다. 대혜스님은 참선에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화두를 보라고 가르쳤다. 화두는 온갖 분별과 지견이 끊긴 알맹이이다. 조사들은 이 화두를 뚫어 깨친 것이다.

    화두를 보는 간화선(看話禪) 외에 화두를 보지 않고 참선하는 묵조선(黙照禪)이 있다. 교리적으로 들어가는 관법은 묵조선과 일맥상통한다. 참선은 반드시 화두를 보는 간화선이라야만 한다고 고집할 것은 없다고 본다. 교법에 의한 관법으로도 깊은 도리를 깨칠 수 있으며 묵조선으로 깨친 조사도 많다. 그것은 중생 근기가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4. 화두란 무엇인가?
    화두는 자성을 깨쳐 들어가는 법칙이다.
    이것을 움직일 수 없는 법령이라는 뜻에서 공안(公案)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보자.

    “어떤 것이 불법입니까(如何是佛)?” 하고 물으니 “삼 세 근이니라(麻三斤).”고 대답하였다. 또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하니 “마른 똥막대기이다(乾屎橛).”라고 대답하였다. 이 대답한 도리는 팔만대장경을 다 보아도 해결되지 않는다.

    이 알 수 없는 것을 참구하는 것이 화두 공부다.
    이것은 사람들이 나쁜 지견과 분별심이 많으므로 그것을 없애려고 이와 같이 말과 생각의 길이 끊어진 ‘본분의 말’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화두는 망념을 깨뜨리고 곧바로 대도를 성취하는 길이므로 거기에는 반드시 본분종사(本分宗師)를 만나 배워야 한다. 대혜스님이 ‘무자화두(無字話頭)’ 하는 데 있어 열 가지 잘못된 길을 가려 말한 것이 있다. 이것은 ‘무자화두’에만 한한 것이 아니다. 참선 공부하는 데는 모두 적용되는 것이다.

    5. 도를 깨친 스님들
    참선하는데 화두를 가지고 참구하는 방법〔看話禪〕과 화두가 없이 공부하는 방법〔黙照禪〕이 있다는 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다. 그런데 어느 쪽이 더 우월한 방법이냐고 묻는다면 사실 우열은 없는 것이다. 근기에 따라 문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육조혜능의 법을 이은 선종(禪宗)의 5종 가운데 임제종, 운문종, 위앙종, 법안종은 간화선이고 조동종만이 묵조선이다. 간화선측에서는 묵조선이 일천한 공부라고 말하지만 그런 것은 아니다. 조동종에서도 많은 조사가 나왔는데 방법을 가지고 힐난할 것이 아니라 몸 바쳐서 착실하게 참구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렇게 할 때 필경 이르는 문이 깨달음의 문이다.

    중국 위앙종의 2대 조사인 앙산스님이 사제(아우)되는 향엄스님에게 “요즘 아우님의 견처(見處)는 어떠한가?” 하고 묻자 향엄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지난해 가난은 가난한 것이 아니라,
    금년에 가난한 것이 비로소 가난이다.
    지난해는 송곳 꽂을 땅도 없더니
    금년에는 송곳마저도 없도다.”

    그러자 그의 사형되는 앙산스님이 “여래선 정도는 보았다고 할 수 있지만 아직 조사선은 못 보았다.”고 하였다. 왜 그러냐 하면 아직도 견해가 붙어 있기 때문에 확실히 깨친 것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이 말을 듣자 그는 더욱 분발심을 내어 3년을 더 공부하였다. 3년이 지나 자기의 허물을 알고 이렇게 말하였다. “나에게 한 고동(機)이 있다.” 하고는 눈을 꿈뻑하며 “알겠느냐?” 한다. “만약 모르겠다 하면 ‘사미야!’ 하고 어린 동자를 부를 것이다.”

    이 스님은 이제 비로소 조사선을 안 것이었다.
    이하에 참선에서 오도한 예를 약간 들어본다.

    남악회양 선사
    육조스님의 제자인 남악회양(南嶽懷讓) 선사가 숭산(崇山)에서 처음 왔을 때다. 육조스님에게 인사를 하니 스님이 물었다.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이 물음에 회양스님의 입이 꽉 막혀 버렸다. 그는 그 뒤 이 말(화두)을 참구하여 8년만에야 깨치고 육조스님을 찾아갔다.

    “이제 알았습니다.”
    “어떻게 알았느냐?”
    “설사 한 물건이라 하여도 맞지 않습니다.”
    “도리어 닦아 증득할 것이 있느냐?”
    “닦아 증득하는 도리는 없지 않사오나 물들고 더럽히는 것은 없습니다.”

    망상에 사로잡히는 일은 결코 없지만 힘을 키우는 도리가 없지 않다는 말이다. 이 때 육조스님이 말씀하였다.

    “물들일래야 물들일 수 없는 이 자리가 모든 부처님이 호념하시는 바이다. 네가 이와 같고 나도 또한 이와 같다.”

    이렇게 되어 육조스님의 인가를 받은 것이다.

    경허스님
    이번에는 경허스님을 말해 본다.
    경허스님은 다 아는 바와 같이 근대 한국불교 선맥의 중흥조다.
    계룡산 동학사 강원에서 학인들에게 경을 가르치고 있었다.

    어느 해, 은사 스님을 찾아뵈러 길을 나섰는데 때마침 유행병이 돌고 있었다. 해가 저물어 어느 집에 찾아들어 쉬고자 하여도 집 주인은 스님을 안으로 들이려 하지 않았다. 열 집을 돌아다녔지만 끝내 잘 곳을 얻지 못한 채 밖에서 밤을 새웠다.

    그 당시 유행병에 수많은 사람이 죽어갔다. 무상이 뼈에 사무쳐 동학사로 돌아와 학인들을 모두 내보냈다. 그리고는 혼자 조실방에 앉아 참선을 하면서『전등록』을 열람하는데 막히는 언구(言句)가 없었다.

    그런데 ‘여사미거 마사도래(驪事未去 馬事到來)’라고 하는 공안에 이르러 그만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그 때에 옆방에서 어떤 처사가 젊은 스님을 붙잡고 거침없이 법담을 하고 있는 것이 들려 왔다.

    처사가 물었다.
    “시주들의 정성들인 공양을 받아 먹고서 공부 잘못하면 죽어서 그 시주 집에 가서 소가 된다는데 그렇게 되면 어쩔테요?”

    젊은 스님은 아무런 대답도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 때 처사가 또 말을 한다.
    “소가 되어도 콧구멍 없는 소가 되면 되지 않겠느냐고 대답하면 될 텐데 왜 그렇게 대답을 못하오?”

    경허스님이 옆방에서 이 말을 듣고 있다가 그만 앞의 “나귀 일이 가기 전에 말 일이 다가온다.”는 말에서 막혔던 의문이 확 풀렸다. 동시에 심지가 밝게 드러난 것이다. 그 때에 경허스님은 다음과 같이 게송을 지었다.

    홀연히 사람이 콧구멍 없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몰록 삼천대천세계가 내 집인 줄 알았네.
    6월달 연암산 아랫길에서
    들사람이 한가로이 태평가를 부르더라.
    이것이 경허스님의 오도송이다.

    한암선사
    이번에는 한암(漢巖)스님의 경우를 들어 본다.
    한암스님이 9세 때 집에서 한학을 공부하는데『사략(史略)』을 읽을 때였다.
    선생님이 “태고(太古)에 천황씨가 있었다.”고 하자 한암스님이 묻기를, “천황씨 이전에는 무엇이 있었습니까?” “반고(盤古)씨가 있었느니라.” 또 묻기를 “반고씨 이전에는 무엇이 있었습니까?” 이 물음에 선생님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한암스님은 의심이 풀리지 않았다. 반고씨 이전에 누가 있었는지 궁금했다. 이 문제는 20세 때가 되어 유학을 마칠 때까지 풀리지 않았다.

    22세가 되던 해 어느 날 금강산에 구경갔다가 그만 출가하고 말았다. 금강산 신계사(神溪寺)에 머물면서 경전공부를 하는데 하루는 보조국사의 수심결을 읽다가,

    “‘만약 마음 밖에 (별도로) 부처가 있고 성품 밖에 법(진리)이 있다.’는 이 생각에 굳게 집착하여 불도를 구한다면, 비록 이 겁이 다하도록 몸을 태우고 팔을 태우며 (중략), (그리고) 모든 경전을 줄줄 읽고 갖가지 고행을 닦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마치 모래를 가지고 밥을 짓는 것과 같아서 한갓 수고로움만 더할 뿐이다.” 라고 하는 대목에 이르러, 마음에 무언가 뭉클 느껴오는 바가 있었다.

    그래서 경전공부를 그만두고자 생각하고 있는데, 또 장안사 해운암이 하룻밤 사이에 전소되어 여러 사람이 불에 타 죽었다는 말을 듣고는 세상이 아주 꿈같이 허망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경 보는 것을 그만두고 경허스님을 찾아갔다.

    경허스님은 당대의 고승이었다.
    어느 날 경허스님이 법상에 올라 법문을 하셨다.

    “범소유상(凡所有相)이 개시허망(皆是虛妄)이니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하면 즉견여래(卽見如來)니라.
    무릇 있는 바 상은 다 허망한 것이니
    만약 모든 상을 상 아닌 줄 보면 곧 여래를 볼 것이다.”
    이 대목에서 확연히 눈이 열렸다.
    9세 때부터 품어 왔던 의심이 그 때서야 확 풀리고 말았다.
    현대 한국불교의 높은 봉우리를 이루고 있는 한암스님은 이렇게 하여 탄생했던 것이다.

    6. 처음 참선하는 분에게
    비유를 들어 보자.
    어떤 사람이 험한 산길에서 허리가 부러지도록 삼(麻)을 지고 몇천 리를 걸어가다가 금항아리를 만났다. 그 값어치가 어마어마하게 나가는 보물이었다. 그 사람은 밤새도록 망설였다. 삼짐을 지고 가자니 금항아리는 버려야 하고 금항아리를 지고 가자니 삼을 버려야 했다. 어떻게 할까 망설이다가 그는 마침내 금항아리도 중요하지만 먼 길을 지고 온 노력이 아까워서 그대로 삼을 지고 가기로 하였다.

    이것은 비유지만 이 얼마나 어리석은 노릇인가. 진짜 보배를 만났으면 아무리 공들여 얻은 것이라도 가짜는 버려야 한다. 그와 같이 참선문에 들어오려면 묵은 지식, 묵은 알음알이, 선입견을 깨끗이 버려야 한다. “이 문에 들어와서는 알음알이를 두지 마라(入此門來 莫存知解).” 하는 것이다. 오직 귀한 것은 진정한 선지식을 의지하여 종전의 잘못된 지견을 모두 버리고 순수한 마음으로 법문을 받아들여서 오직 실답게 참구하여야 한다.

    참선법문에 비하면 모든 교리는 등에 진 삼에 불과하고, 참선은 금항아리와 같은 것임을 철저히 알아야 한다. 인생의 가장 귀한 것은 정법을 만나는 일이다. 정법을 만났으면 결코 빈 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금생에 해탈문 중 큰 보배를 꼭 잡도록 해야 할 것이다.

禪이란 무엇인가.mp3
18.17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