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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과 지혜

by 이初心 2023. 3. 13.


    참선과 명상

    참선과 명상은 엄연히 다르다.
    의미도 다르고 방법도 다르며 목적도 다르다.
    참선은 참선 그 자체의 독특한 수행법을 갖고 있기에 명상이라 번역하지 않고 그냥 본래대로 禪이라고 옮겨놓았다.

    이 선에도 다양한 차제가 있다.
    선원제전집에서 규봉선사는 참선에는 외도선과 범부선, 소승선, 대승선, 최상승선, 여래선, 조사선이 있다고 했다. 이 중에서 한국불교는 중국의 조사선인 직지인심 견성성불이라는 모토의 수행법을 종풍으로 삼아 그 법맥을 이어왔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명상 수련법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참선의 개념을 지혜로 관조하지 않으면 명상과 같다는 혼란을 엉뚱하게 일으킬 수 있다. 불교인이 요가수행자가 되기도 하고 명상 수행자가 되기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면 그 사람은 그때부터 더 이상 불교의 정통 수행자라 말할 수 없다.

    대승불교를 정립시키신 분이 마명보살이다.
    발심수행장 서두에서도 말했듯이 이 보살이 참선을 범부의 수행법에 넣을 때 그 용도를 부처가 되는 깨달음에 두고 있지 않다는 것을 다시 한번 더 말한다.

    오로지 참선이란 네 가지 믿음을 일으키는 도구일 뿐 견성성불하고는 관계가 없다. 그래서 역사 이래로 참선을 해서 부처가 된 자가 없다고 말했다.

    결론을 내리자면 참선의 원래 목적은 자신의 공덕을 발기하여 네 가지 믿음을 일으키는 데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중국에 들어와 도교의 선도 사상과 섞여버리면 졸지에 직지인심 견성성불이라는 엄청난 괴력을 지닌 수행법으로 탈바꿈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조계종 큰 절에서도 다 그렇게 말하는데 왜 유독 스님만 그렇게 말하느냐고 한다. 나는 절에서 말하는 것보다 불교에서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고 조사가 가르치는 것보다 보살이 가르치는 것이 더 확정적이라고 고증한다.

    “그럼 스님은 조사선을 하지 않으면 무슨 선을 하십니까?”
    “나는 보살선을 합니다.”
    “헐!”

    공덕이 생기면 세상을 보는 시각이 아주 정밀해진다.
    찡그린 사람이 세상을 보면 세상이 찡그려지게 보인다.
    행복한 사람이 세상을 보면 행복하게 보인다.
    복 없는 사람이 세상을 보면 세상은 치열하게 살아가는 삶의 중심 공간이 되지만, 공덕이 있는 사람이 세상을 보면 세상은 가짜로 보여 연극처럼 재미있게 살아가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진짜의 세계를 찾는다.
    이것은 가짜 다이아몬드반지라도 가져본 사람이라야만 진짜 다이아몬드를 찾게 되는 것과 같다. 그렇지 않으면 다이아몬드가 어떻게 생겨서 어떤 빛을 발하는지조차 짐작이 가지 않는다.

    참선인 선정과 관찰인 지혜는 함께 수행해야 하는 과제다.
    어느 것이 먼저고 뒤라 할 수가 없다.
    새의 양 날개는 어느 쪽이 앞선다고 말할 수 없다.
    똑같이 작동해야 날아오를 수 있다.
    다시 말한다.
    정혜는 반드시 쌍수이다.
    이 쌍수에 만 가지 수행이 다 들어가고 만 가지 의심이 다 끊어져 무한의 공덕을 일으킨다.

    정리하자면 망념이 만들어낸 세상은 허위이기 때문에 그 망념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 참선을 닦는다. 다른 말로 하자면 참선은 세상이 허위라는 전제하에 닦는 것이고, 지혜는 세상이 엄연하게 존재한다는 사실하에 닦는다. 이를 원효 스님은 해동소에서 이렇게 표현하셨다.

    諸法不無而非是有
    諸法不有而非都無
    눈앞에 보이는 세상은 없지 아니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있는 것은 아니다.
    눈앞에 보이는 세상은 있지 아니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도무지 없는 것도 아니다.

    윗줄의 내용은 세상이 있지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참선을 해서 그 본질로 들어가라는 것이고, 아랫줄의 내용은 세상이 없지만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혜로써 관찰하여 그 인연 생기를 직관하라는 것이다.

    참선에 의해 망념의 요동이 그쳐지고 지혜에 의해 인과가 역연하게 나타난다. 그 결과 참선을 하면 망념을 일으키는 인연이 그쳐지고 지혜를 닦으면 범부가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 세상이 가짜라는 것을 알게 되어 진짜를 찾아 발심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마명보살이 정립해놓은 참선의 궁극적인 기능이고 목적이다.

    이런 순기능이 와전되면 정말 악기능이 되어버린다.
    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잘못 먹으면 독이 되고 남용하면 안 먹는 것만 못하다.

    참선이 비록 신심을 일으키는 최고의 방법이라 하지만 오용하거나 남용해버리면 없는 것만 못하고 안 하는 것만 못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각지 해야 한다. 그러므로 참선을 시키되 올바른 지혜를 병행해 가르쳐주지 않으면 아무런 역동성과 생동감이 없다.

    죄 없는 몸만 절구통처럼 앉혀 놓고 있을 뿐 마음은 시장 바닥을 헤매고 다녀도 그대로 방치된다.

    범부가 왜 참선을 해야 하는지,
    그 목적 자체가 무엇인지,
    도고마성이라고 어떤 마장들이 언제 어떻게 나타나는지,
    그것을 어떻게 대치해야 하는지,
    몇 번의 과정을 거쳐 어떻게 삼매에 도달하는지에 대한 뚜렷한 메뉴얼도 없이, 그저 참선을 한다면 그것은 참선의 매너리즘에 빠진 것 외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자리이타 역시 같은 이치이다.
    구경각을 이루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원대한 발원을 세워야 한다. 그 발원은 사홍서원이다.
    대승불교에서 이 발원 없이는 부처가 되고 싶어도 되지를 못한다. 그러므로 자기 하나 먹고 살기에 급급한 수행자라면 이 말씀 하고 전혀 연관성을 가지지 못한다.

    범부들을 기준으로 보면, 어쩌다가 아주 조그마하게 타인과 함께 나눌 복이 생기게 되면 겨우 이성의 짝이 생긴다. 그들을 애인이라고 부른다. 애인이 웃으면 행복하고 애인이 울면 슬퍼진다. 이럴 때 애인과 한 몸이 되는 것이다.

    이제 겨우 한 사람을 가슴에 포용할 만한 공간이 만들어진 것이다.
    더 나아가면 가족이 그렇게 되고, 더 나아가면 한 나라, 한 민족, 인류, 중생이 그렇게 나와 한 몸이 되는 것이다.

    내가 편안하려면 주위가 편안해야 한다.
    내가 안락하고자 하면 주위가 안락해야 한다.
    내가 문화적 삶을 누리려면 주위가 문화적이어야 한다.
    나 혼자 아무리 고상하고 품위 있게 살고 싶어도 장소가 빈민 소굴이면 삶이 거칠고 황폐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내가 살기 위해서는 주위를 먼저 살려야 한다.
    이것이 바로 범부가 자리이타 해야 하는 이유이다.
    이것은 꼭 내 아이들이 아프면 내가 고통스럽고 내 아이들이 잘 자면 내가 숙면을 취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自利만 하면 한쪽 날개를 가진 새처럼 자유롭게 창공을 비상할 수 없다. 제자리에서 계속 퍼덕거릴 뿐 도약이 되지 않는다.

    참선은 자리이고 지혜는 이타이기 때문에 두 개를 동시에 수학해야만 자리와 이타가 원만해져 거침없이 허공에 날아오를 수 있다. 그러면 자유롭게 세상을 유영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전 법계 중생이 나와 한 몸이라는 사실을 알 때까지 수많은 세월 동안 복과 덕을 쌓고 닦아 나가야 한다. 장장 3대겁 아승기야 세월보다도 더 오랫동안 일체중생들을 가슴에 품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바로 중생무변서원도의 요점이다.

    유마거사가 말했다.
    일체중생이 아프므로 내가 아프다.
    문수반야경에서 문수보살이 말씀하셨다.
    일체중생은 나와 한 몸이다.
    내 몸 말고 또 다른 중생은 없다.

    이 대목에서 원효 스님은, 대승의 수행자는 반드시 止觀을 함께 닦아야 하고, 그 발원은 자리이타에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다. 그러므로 꼭 기억해야 한다. 참선과 지혜는 반드시 함께 닦아야 한다는 사실을!

    -발심수행장 중에서-
    출처: 사이버에서 검색

참선과 지혜.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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